한일 조약 두문자 : 의 충 협 고 을 통 정 차 경 총
의 : 한일의정서(1904.2)
충 : 충고정치
협 : 제1차 한일협약(1904.8)
고 : 고문정치
을 : 제2차 한일협약(1905.11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통 : 통감정치
정 : 한일신협약(1907.7 정미7조약)
차 : 차관정치
경 : 경술국치(1910.8 한일병합조약)
총 : 총독정치
1. 한일의정서(1904.2) : 충고정치
한일의정서는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이다.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양국 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하였고 주한러시아공사는 서울을 떠났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일본군 제12사단장과 함께 한일 간의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가 조인되었다. 이로써 일제는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했고 통신기관도 군용으로 강제 접수했으며 철도부설권과 연안어업권을 강탈해 갔다.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채 자행한 제국주의적 침탈이었다.
이 전문(全文)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 · 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 · 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
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
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
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 의정서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제2조와 제3조에서 비록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증한다고 하였으나, 그 뒤의 경과에서 명백해졌듯이 실효성 없는 규정일 뿐이었다. 제1 · 4 · 5 · 6조는 어느 것이나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제국주의적 침략 수법이 은연중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치적 · 군사적 · 외교적인 면에 있어서 한국에 대한 식민지 경영을 합리화하려는 제1보에 다르지 않았다.
이 치욕적인 의정서가 같은 해 3월 8일자 관보에 실리자 온 국민의 비난과 반대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았다. 이는 언론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정부의 처사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드디어는 의정서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서리 이지용과 동 참사관(參事官)인 통역 구완희를 매국노로 규탄, 그들의 집에 폭탄이 던지는 등의 극한 행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그 대책으로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이토(伊藤博文)를 한일친선 특파대신에 임명하였다. 그 해 3월 17일 내한한 이토는, 이른바 ‘친선’을 강조하며 체류 10일간 한편으론 무력으로 위협하고 한편으론 무마로써 이를 진정시켰다. 이에 한국 정부는 답례로서 이지용을 보빙사로 일본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기초작업이 끝나자 청일전쟁 후 일본과 대치하던 러시아 세력은 서울 정계에서 사라지고, 일본에 아부하는 이론과 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 결과 일제는 의정서에 의거해 군사행동과 수용 · 강점을 제멋대로 감행,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였고,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 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하였다.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 조칙으로 한 · 러 간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언하고, 러시아인이나 러시아회사에 넘겨주었던 모든 권리도 취소하였다. 또한 경부(京釜) · 경의(京義) 철도부설권을 군용으로 일제에게 제공하였다.
같은 해 6월 4일에는 「한일양국인민어로구역(韓日兩國人民漁撈區域)에 관한 조약」을 체결해 충청 · 황해 · 평안 3도 연안의 어업권을 일본인에게 넘겨주었다.
2. 제1차 한일협약(1904.8) : 고문정치
제1차 한일협약이라 함은 1904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에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의 조약을 말한다. 1904년 2월 러일 전쟁 중 일본은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여 무력으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함으로써 한반도를 군사 기지로 확보하였다. 곧이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 재정, 교통 기관, 통신 등을 장악하는 식민지화의 구체적인 시책으로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의 재정 및 외교 정책 쇄신을 위한 외국 고문의 초빙에 대한 협정 체결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여 1904년 8월 22일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했다.
총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제1차 한일 협약의 제1조는 재정고문에 관한 내용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재정고문 1인을 고용하고, 재정에 관한 모든 사항을 고문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규정했다. 제2조는 외교고문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1인을 외교고문으로 고용하고, 외교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외교고문에게 물어 시행하도록 규정했다. 제3조는 중요한 외교적 사안, 즉 대한제국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외국인에 대해 특권을 준다거나 계약 등을 체결하기에 앞서 일본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친일 성향의 미국인 스티븐슨(Durb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또 일제는 재정과 외교 외에도 군부, 학부, 경무, 교육 등에 일본인 고문과 참여관들을 고용하도록 강제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제가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 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고문정치는 1904년 8월에 체결된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따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 등을 간섭한 정치이다. 일본은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고문협약을 강요하고,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 외교 고문 스티븐스(D.W.Stevens)를 파견하였다. 그 밖에 궁내부 고문, 경무 고문, 법부 고문, 군부 고문, 학정(學政) 참여관, 광산 고문을 비롯하여 보좌관, 교관 등의 명목으로 수많은 일본인 고문들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은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을 파견함으로써 고문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로 군사적인 강점주1 상태에서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와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을 시작한 것이다.
먼저 재정 고문으로 1904년 10월 14일,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主稅局長) 출신의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대한제국 정부와 용빙주2 계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외교 고문으로는 같은 해 12월 27일에 일본이 추천한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가 초빙되었다.
메가타는 재정에 관한 일체 사항을 심의할 권리가 있고, 의정부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정에 관한 의견을 황제에게 직접 상주주3할 수 있고, 대한제국 정부가 해고하려고 해도 일본이 동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의 재무 감독관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메가타는 재정 정리를 명분으로 황실 재산 정리 및 관제 개혁, 군비 축소 등 대한제국 통치 전반에 걸쳐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반면 외교 고문 스티븐스는 일본 정부가 추천을 취소하면 속히 해약해야만 하였고, 또 중요 안건은 모두 주한일본공사 및 일본 정부와 협의하게 되어 있었다.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의 해외 공관을 철수하는 방법으로 을사늑약 체결 전부터 이미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외교권 행사를 제한하였다. 그런데 고문용빙 조약에 의거한 재정 고문, 외교 고문 외에도 일본은 궁내부 고문, 경무 고문, 군부 고문, 법부 고문, 학정(學政) 참여관, 광산 고문 등 수많은 일본인 고문, 보좌관, 교관 등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하여 갔다.
특히 주한일본공사를 재임하였고 농상공부 고문으로 있던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는 재정 고문, 외교 고문이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인 1904년 9월 10일, 궁내부 고문에 임명되어 대한제국기에 황제권의 실현기구로 대폭 확대된 궁내부 제도를 축소하는 데 착수하였다. 치안 경찰권의 장악을 위해 1905년 2월 3일에는 일본 경시청 제1부장 출신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무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 밖에 일본 농상무성 지질조사 소장 출신의 고치베 다다우케[巨智部忠承]가 광산 고문에, 대한제국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학정(學政) 참여관으로 용빙되었다. 한국 주차군(駐箚軍) 사령부 국제법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노자와 다케노스케[野澤武之助]는 법부 고문으로 초빙되었고, 군부 고문에는 주한일본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던 육군중좌 노즈 시노타케[野津鎭武]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제1차 한일협약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대한제국 정부와 용빙 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재정 고문이나 외교 고문보다는 그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 고문들은 종래 대한제국에 고용되어 단순히 기술적 자문을 담당하였던 서양인 고문들과는 그 위상이 달랐다.
일본 정부가 직접 추천하여 파견하고 주한일본공사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고문정치체제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갑오개혁 때에도 40여 명의 고문관을 파견한 적이 있으나, 이때의 고문관은 주로 근대식 법령 제정 등을 자문한 데 그친 반면, 1904년 이후에 파견한 일본인 고문들은 직접 대한제국 행정 각 분야에서 집행까지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재정 고문과 경무 고문은 그 소속 관리들까지 집단으로 용빙하여 재정 고문부, 경무 고문부라는 기구를 구성하고 독립적인 집행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즉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전에 이미 고문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제2차 한일협약(1905.11 을사늑약 외교권 박탈) : 통감정치
을사늑약이라 함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을 말한다.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5조약·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한다. 을사조약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 및 일본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이를 위하여 이 조관(條款)을 약정한다.
제1조, 일본국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
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정부는 금후 일
본국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게 하며, 통감은 오로
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서울)에 주재하고 한국 황제폐하를 친히 내알(內謁)할 권
리를 가진다. 일본국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일본국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
관(理事官)을 둘 권리를 가지며,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 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한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에 있던 한국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고 영국·미국·청국·독일·벨기에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 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조약 체결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통감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에서까지도 우리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하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국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을사5적을 규탄하며 조약 반대투쟁에 나섰다.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 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Hulburt, H. B.)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에 전달하기 바란다.”
라고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하라고 하였다. 이 사실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이듬해 1월 13일 『런던타임즈』지가 이토의 협박과 강압으로 조약이 체결된 사정을 상세히 보도하였으며, 프랑스 공법학자 레이도 프랑스 잡지 『국제공법』 1906년 2월호에 쓴 특별 기고에서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한편,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뜻있는 인사들이 죽음으로써 조국의 수호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하여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법부주사 송병찬(宋秉瓚), 전 참정(參政) 홍만식(洪萬植),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 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병정(兵丁) 전봉학(全奉學)·윤두병(尹斗炳)·송병선(宋秉璿)·이건석(李建奭) 등의 중신과 지사들이 그들이었다. 이밖에 청국인 반종례(潘宗禮)와 일본인 니시자카[西坂坡豐]도 투신자결로 조약 반대의사를 천명하였다.
그런 한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전라도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이, 강원도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이 각각 의병을 일으켰고, 이근택·권중현 등을 암살하려는 의거도 일어났다. 그와 함께 구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유교와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자신회(自新會)·대한자강회·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서우학회(西友學會)·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 등이 표면상으로는 문화운동을 표방하며 국민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산하에 비밀결사를 두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4. 한일신협약(1907.7 정미7조약)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은 1907년 7월 24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위해 체결한 불평등조약이다. 전체 7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등 일체의 사무에 대해 승인권을 장악함으로써 입법, 사법 및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의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고문정치를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일부분 장악해 가고 있었지만, 고종의 반발로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었다. 일제는 고종의 황제권을 제한할 기회를 노리던 중 1907년 6월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황제 폐위를 추진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을 더 강력히 장악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속히 한국의 부강을 도모하고 한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다음의 조항을 약속해 정한다.
-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보통 행정 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에 의해 이를 집행할 것.
-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할 것.
- 제6조 한국 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용빙하지 말 것.
- 제7조 메이지 37년(1904)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을 폐지할 것.
광무 11년 7월 24일 /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 메이지 40년 7월 24일 / 통감후작 이토 히로부미
한일신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 등 일체의 사무에 대한 승인권을 장악하였다. 일제는 입법, 사법, 및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내정 전반을 장악하는 한편, 협약문과 별도로 ‘각서’를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기로 계획하였다.
일제는 1907년 7월 31일 순종 황제에게 군대해산 조칙을 재가하도록 한 후 8월 1일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국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물리력을 모두 빼앗았다. 군대가 해산된 후 해산 군인까지 참여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차관정치라 함은 1907년 한일 신협약 체결 후 일본인이 대한제국 내각의 차관에 임명되어, 정부를 장악하고 일제의 침략 의도대로 집행한 정치를 말한다. 1907년 7월 24일 내각총리 이완용(李完用)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일 신협약(제3차 한일 협약,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은 총 7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5조에서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관리로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또 조약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침을 담고 있는 「한일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의 제5조에는 일본인 관리의 임명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중앙 정부에는 각 부의 차관(次官)을 비롯하여 내부의 경무국장, 경무사 및 부경무사, 내각 서기관 및 서기랑, 각 부 서기관 및 서리랑 등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지방에도 사무관, 경무관, 주사 등에 일본인을 임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조약 내용에 따라 1908년 8월 궁내부차관 스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내부차관 기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 학부차관 타와라 마고이치(俵孫一)가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 정부 내 주요 관직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을 장악해 갔다. 이들은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의 고문 용빙에 관한 규정에 따라 한국 정부에 고문으로 참여했거나 통감부에서 재직했던 인물들이었다. 지방에서도 사무관을 비롯해 주사까지 일본인이 임명되고, 한국인들의 반일 활동을 막기 위해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국장, 경무사, 부경무사 등에도 일본인이 임명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기존의 고문 정치를 폐지하고 차관 정치를 실행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에 이어 행정과 사법의 내정까지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5. 경술국치(1910.8 한일병합조약)
한일합병은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일이다. 경술국치라고도 한다. 1910년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온 데라우치 육군대신은 종래에 지니고 있던 사법·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은 8월 16일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했다. 22일 조약이 조인되면서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조약 제1조에서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경술국치 · 국권 피탈 · 일제 강점 · 일제 병탄 등으로도 불린다. 대원군 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맞이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 · 경제 · 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조선은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일전쟁 직후 삼국 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 이와 같이 배일친러정책을 표방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일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 · 미의 지지 하에 한국의 식민지화 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이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민의 항일투쟁을 탄압할 목적에서 ‘치안담당’을 구실삼아 1904년 7월부터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민은 경향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04년 8월 일제는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나아가 한국 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 · 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른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 결과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 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 놓은 상황에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국권을 강탈당해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완전히 박탈되어, 영국 · 청 · 미국 · 독일 등 주한 외국공관들도 철수하고 말았다.
고종은 이와 같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 수호를 호소할 목적으로 1907년 6월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파견 사실을 안 일제는 7월 20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 한국의 내정권마저 장악하였다. 같은 달 27일에는 언론 탄압을 목적으로 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민의 항일 활동을 한층 탄압하였다. 이어서 한국 식민지화의 최대 장애였던 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8월 1일부터 약 한 달에 걸쳐 단행하였다.
이때 상당수의 한국 군인은 군대 해산에 반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의병에 합류하였고, 이로써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된 의병 항전은 대일 전면전의 성격으로 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 항전은 1909년 9월,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에 밀려 그 기세가 누그러진다. 일제의 국권 침탈이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상당수 항일민족운동자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 망명하게 되었다. 한편,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 이토를 총살, 한민족의 울분을 대변하였다.
그 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 식민화를 단행하도록 하였다. 데라우치는 막바지 준비 작업으로 헌병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서둘러 정비하였다. 1907년 10월 일제는 한국 경찰을 일제 경찰에 통합시켰는데, 1910년 6월 각서를 교환함으로써 종래의 사법 · 경찰권 이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그들 손아귀에 넣었다. 이로써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시기만을 노리게 되었다.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암흑의 일제시대 36년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뒤로 미루었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게 넘길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4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를 세워 한국 통치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초대총독으로 데라우치를 임명하였다. 그 동안에도 일제 자본가들은 통감부의 보호와 원조를 배경으로 한국에서의 경제적 지배를 확립, 금융 · 광업 · 임업 · 어업 · 운수 · 통신 등 산업의 모든 분야를 완전 독점하고 말았다.
한편,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농업의 지배 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많은 토지를 탈취, 대다수의 한국 농민이 일제 수탈의 대상으로 화하고 말았다. 또, 1910년 12월에 내려진 「회사령」은 한국인의 기업 설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문화 · 교육면에 있어서도 한국 고유의 전통은 하나하나 파괴되어 갔으며, 「사립학교령」으로 인해 한국민이 주체가 된 교육 기관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언론 · 출판 역시 단속이 심해졌다. 또한, 일어사용이 강요되고 일체 집회가 금지되어 한국의 민족 문화 및 예술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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