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서간도 독립군 기지 : 경 부 한 서
경 : 경학사 서전서숙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부 : 부민단
한 : 한족회
서 : 서로군정서
1. 경학사 서전서숙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경학사라 함은 1910년대 초 서간도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1909년 봄 국내의 비밀 항일운동단체인 신민회 간부들이 서울 양기탁의 집에 모여,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의 한계성을 절실히 느끼고, 제2의 독립운동기지를 선정할 것과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신민회 간부들은 각 도에 책임자를 선정, 군자금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그 해 여름 신민회 간부 이회영을 서간도로 파견해 독립운동기지를 물색하게 하여,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지방(鄒家街地方)을 선정하였다.
신민회의 군자금조달사업은 이른바 데라우치총독암살미수사건으로 차질이 빚어졌으나, 독립운동지도자들의 만주 이주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이시영의 다섯 형제와 이상룡 · 김창환 · 이동녕 · 여준 · 이탁 등 각 도의 대표적 인사 100여 명이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하여 삼원보를 중심으로 토지를 구입,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1년 4월 그 곳에 모인 민족지도자들은 삼원보 고산자(孤山子)에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고,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여 다음과 같은 5개 조항을 의결하였다.
①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②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③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④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⑤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한다.
이 결의에 따라 사장에 이철영, 부사장에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 · 이원일(李源一), 학무에 이광 · 여준, 재무에 이휘림(李彙淋) · 김자순(金子淳), 조사에 황만영(黃萬榮) · 박건, 조직에 주진수(朱鎭洙) · 김창무(金昌武), 외무에 송덕규(宋德奎) · 정선백(鄭善佰) 등이 선임되었다. 설립 목적은 병농제(兵農制)를 채택하여 근로정신에 입각, 학술을 연마하고 구국 인재를 양성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데 두었다. 그리하여 먼저 황무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 구국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하기로 하였다.
경학사는 무엇보다 인재 양성을 중요시하여 1912년 3월 이회영이 전에 구입하여 놓은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학교를 세우고, 유하현 대고산에도 학교를 신축하여 신흥학교의 제3기지를 설치하는 등 교육사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사업이 나날이 발전, 국내에서 많은 애국 청년들이 만주로 건너와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11년 뜻하지 않은 서리가 내림으로써 그 동안 가꾸어 놓았던 농작물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1912년에도 대흉년을 만나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였고 많은 사람이 풍토병으로 고생하였다. 이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운영난에 부닥쳐 사실상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1912년 부민단이 조직되어 경학사의 이념과 사업을 계승함으로써 그 명맥이 이어졌다.
부민단은 1919년 3 · 1운동 직후 한족회로 개편되었다. 이 한족회는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신흥강습소의 후신인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사관을 양성함으로써, 경학사의 당초 취지는 이때에 와서야 완성을 보게 되었다.
2. 부민단
부민단이라 함은 서간도 지역 한인 사회의 자치 기구였던 경학사(耕學社)를 모태로 결성된 항일 한인 자치 단체를 말한다. 이회영, 이시영, 이상룡 등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자치 기관으로 경학사를 결성하고, 군인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1911~1912년 연이은 흉년으로 자금 모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학사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길림성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본부를 옮겨 새로운 자치 기구로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하였다. 부민단의 중앙 조직은 단장제(團長制)로 운영되었는데, 초대 단장은 허혁(許赫)이 맡았다. 지방 조직은 부락의 크기에 따라 대부락에는 천가장(天家長)을 두었고, 백가부락(百家部落)에는 구단(區團)을 설치하여 백가장(百家長) 또는 구장(區長)을 두었으며, 십가부락(十家部落)에는 십가장(十家長) 또는 패장(牌長)을 두었다. 또한 각 구(區)와 단(團)에는 단총리(團總理), 검찰장, 검찰원 등의 임원이 있어서 서간도의 한인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였다.
부민단은 서간도 지역 6천여 명 이상의 한인들을 관장했는데, 기본적인 사업은 한인의 자치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한인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민사, 형사 사건을 맡아서 처리했으며, 중국인 혹은 중국 관헌과의 분쟁도 맡아서 해결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서간도로 이주해 오는 한인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한인 이주자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서 통화(通化), 환인(桓仁), 안동(安東) 등 서간도의 주요 지역에 임시 숙소를 설치하여 정착할 곳을 찾을 때까지 이주민을 보호해 주었다. 즉, 부민단은 서간도 한인 사회의 사법과 행정을 자임하는 명실상부한 자치 단체였다.
자치 사업 외에 또 다른 부민단의 중요한 사업은 서간도에 있는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를 지원하는 일이었다. 신흥 무관 학교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독립운동의 핵심 동력을 만드는 것은 독립 전쟁을 위한 핵심적 사업이었다. 더구나 신흥 무관 학교를 거점으로 서간도 청년들에게 민족 교육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한인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이었다. 부민단은 서간도 한인 사회의 자치 단체로서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 의식의 고취, 신흥 무관 학교를 통한 독립군 양성 등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부민단은 주변 단체를 통합해 한족회(韓族會)로 확대⋅개편되었다. 한족회는 유화현⋅통화현뿐 아니라 한인 주민 1만여 호, 약 6만여 명을 관장했다.
3. 한족회
한족회는 1919년 서간도(西間島)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서간도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이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3 · 1운동으로 변화된 시대 상황에 따라 교육회(敎育會), 자신계(自新契)와 통합하여 확대, 개편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기반으로 독립군단을 편성하고 군비 확충과 군사 훈련에 힘썼다.
경술국치 이후 신흥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항일전을 준비해온 서간도의 자치기관인 부민단이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3 1 운동으로 변화된 시대상황에 따라 교육회, 자신계와 통합하여 1919년 3월 13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발회식을 거행하였다.
총장(總長)에 이탁, 서무사장(庶務司長) 김동삼, 외무사장(外務司長) 양규열(梁圭烈), 법무사장(法務司長) [이진산(李震山)], 검찰사장(檢察司長) 최명수(崔明洙), 학무사장(學務司長) 윤기섭, 재무사장(財務司長) 안동원(安東源), 상무사장(商務司長) 김정제(金定濟), 내무사장(內務司長) 곽문(郭文)으로 구성되었다.
삼원보에 근거를 두고 자치를 주 활동으로 삼으면서 시사연구부를 설치하여 시세를 연구케 하였다. 관할구역은 유하, 화전(樺甸), 반석(磐石), 통화(通化), 환인(桓仁), 흥경(興京) 등 서간도 일대였다. 기관지로 이시열(李時說), 허영백(許英伯), 오치무(吳致武) 등이 집필한 「한족신보」을 간행하였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요원을 파견하고, 독립군 모집에 나서면서 군사 활동에 착수하였다. 군사 활동의 기반에는 신흥학교가 있었다. 신흥학교는 3 · 1운동 이후 확대되어 3곳에 본교와 분교를 세우고, 3개의 학도대(學徒隊)를 설립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3 · 1운동 당시 신흥학우단 단원은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군사과를 졸업한 청년은 약 3,000명이었다. 이들로 지방군 1개 여단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대기하고 있었다. 국내외에서 전개되는 모든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할 중앙정부의 건립을 목표로 산하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수립되자, 그 산하에서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며, 1919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청천의 지휘 아래 의용대를 안도현(安圖縣)에 보내는 한편 홍범도 등과도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4. 서로군정서
서로군정서라 함은 1919년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결되어 결성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말한다. 서로 군정서는 서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조성된 독립운동의 역량이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결집되어 조직된 단체였다. 1919년 4월경 서간도 지역 한인들의 통합적 자치 기구인 한족회(韓族會)가 설립되었다. 한족회는 기존에 존재하던 자치 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이 확대 개편한 것으로 부민단이 중심이 되어 자신계⋅교육회 등을 통합하고, 유하현,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임강현, 해룡현, 흥경현 등의 한국인 주민 1만여 호를 토대로 조직되었다.
한족회는 중앙 기관을 삼원포에 두었으며,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치안, 재무, 사법, 행정 등을 담당하였다. 한족회의 책임자는 이탁(李鐸, 1889~1930)으로 김동삼, 김형식, 지상주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족회는 부민단과 마찬가지로 1,000호마다 총관을, 100호마다 백가장을, 10호마다 십실장을 두어 지방 조직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한족회를 기반으로 일종의 임시 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조직된 것이 서로 군정부(西路軍政府)였다. 군정부는 이상룡이 총재를, 여준이 부총재를 맡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서간도 지역에 여운형을 파견하여 군정부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협의 결과, 군정부라는 명칭을 정부가 아닌 임시 정부 산하의 군사 자치 기관을 지칭하는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였고, 행정을 담당하는 한족회는 원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서로 군정서는 산하 기관으로 독판부, 정무청, 내무사, 법무사, 재무사, 학무사, 군무사, 참모부, 사령부, 서의회, 참모처, 군정분서를 두었다. 임원으로는 독판부 독판에 이상룡, 부독판에 여준, 정무청장에 이탁, 내무사장에 곽문, 군무사장에 양규열, 참모부장에 김동삼, 사령관에 지청천이 선출되었다.
서로 군정서는 독립 전쟁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금 문제로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신흥 무관 학교와 연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외에도 국내로 진공하여 친일파 관료 또는 밀정을 제거하거나 주재소나 경찰서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20년 10월 일제는 만주 무장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 지역에 출병시키는 ‘간도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서로 군정서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본부를 북만주 지역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겼고, 백두산 기슭의 안도현(安圖縣)에 군사기지를 두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로 군정서의 기반이었던 한족회가 붕괴되고, 밀산을 거쳐 러시아령 자유시로 갔던 부대가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받고 돌아오게 되면서 서로 군정서의 활동도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서로 군정서는 1922년 봄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 광한단 등과 협의하여 대한 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다른 기관과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여 1922년 8월 남만주 지역의 8단 9회의 대표 71명이 모여 ‘남만 한족 통일 회의’를 열고, 대한 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그렇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24년 11월 정의부 결성에 참여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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