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서 1990년까지 주 단위로 계산을 하면 모두 2천 3백 40주가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이 지구상에 전쟁이 없었던 주는 겨우 3주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통계를 놓고 보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바로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전시가 아니라도 인간은 알게 모르게 전쟁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다.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회중시계가 오늘날과 같은 손목시계로 변하게 된 것도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무장을 하고 전투를 하는 군인들에게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일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래서 남아 전쟁 때 시계공 출신인 영국 장교 한 사람이 회중시계에 밴드를 달아 손목에 차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이 군인들 사이에 퍼지게 되고 전쟁 후에는 일반 시민에게까지 널리 유행하게 된 것이다.
현대인이 애용하는 통조림도 나폴레옹의 전략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음식을 오래 보존할 수 있고 휴대하기 편한 군량을 개발해야만 속도전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1만 2천 프랑의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었고 아벨이라는 사람이 그 원리를 발명하여 세계 최초의 통조림을 내놓게 된다.
현대인들은 평상시에도 손목시계를 차고 통조림 음식을 먹고 살아간다. 생활 양식이 그만큼 전쟁 상황과 비슷해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 출퇴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총성과 피만 흐르지 않는다 뿐이지 전투 장면과 다를게 없다. 그래서 어느새 교통난이 교통 전쟁으로, 입시 경쟁이 입시 전쟁으로 슬며시 탈바꿈을 하고 있다. 기업에도 군사 용어의 새치기가 많다. 경제 전쟁이라는 말을 필두로 판매 전략이라는 말까지 말끝마다 전략 자를 붙이는 말들이 늘어가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6 25 때만 해도 한국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임진왜란이라고 할 때처럼 난(亂)'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전쟁을 난리라고 불렀고 전쟁터에서 소개(疏開)하는 것을 피난이라고 했다. 그래서 전쟁이라고 하면 미군들의 레이션 박스(ration box)에서 나온 그 통조림들이 떠오르고 난리라고 하면 피난 보따리의 미숫가루가 떠오른다.
난리라는 말은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평상시의 인륜이나 생활의 질서가 무너져 어지럽게 되고[亂] 가족과 친지들이 뿔뿔이 흩어진[離]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전쟁은 경쟁의 뜻으로 전용할 수가 있지만 난리란 말은 그렇지가 않다. 입시 전쟁을 입시 난리라고 하고 경제 전쟁을 경제 난리라고 고쳐보면 그 뜻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이기고 지는 것으로 종식이 되지만 난리는 물난리라는 말처럼 복구를 해야만 끝이 난다. 어지러운 것이 다시 정상적인 제자리를 찾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지 않으면 난리판은 사라지지 않는다.
6 25는 사변인가, 동란인가, 혹은 전쟁인가 그 호칭을 놓고 의견들이 많았지만 그것을 난리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야기는 아주 달라진다. 난(亂)을 화(和)로, 이(離)를 합(合)으로 돌이키지 않는 한 6월의 난리는 끝나지 않는다.
난리가 나다 → 큰일이 나다
난리가 터지다 → 큰일이 터지다
홍수로 난리가 나다 → 큰물로 어지럽다
소작 쟁의로 난리를 겪었다 → 소작 쟁의로 어수선하다
난리를 떨다 → 시끄럽다
난리를 피우다 → 시끄럽게 굴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 울고불고 큰일이나
‘난리(亂離)’는
“1. 전쟁이나 병란(兵亂) ≒ 난
2. 분쟁, 재해 따위로 세상이 소란하고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
3. 작은 소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을 가리킨다. ‘큰일·유난·가뭄·장난 아니다’로 손볼 수 있고 ‘시끄럽다·시끌시끌·떠들썩하다·떠들다·법석이다’나 ‘수런거리다·술렁거리다·어수선하다·어지럽다·왁자하다’로 손볼 만하다. 때로는 ‘지껄이다·짜하다·나대다·나부대다’나 ‘북새통·북새판’이나 ‘오두방정·방정맞다’으로 손보아도 어울린다. 이밖에 한국말사전에 한자말 ‘난리(亂理)’를 “도리(道理)를 어지럽힘. 또는 도리에 어긋남”으로 풀이한다.
나는 자네와의 여러 가지 친분 때문에 모른 척했었는데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네 죽여버린다고 난리야
→ 나는 자네와 여러 가지로 가까워 모른 척했는데 요새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네 죽여버린다고 시끄러워
→ 나는 자네와 여러모로 알고 지내 모른 척했는데 요즘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네 죽여버린다고 시끌거려
→ 나는 자네를 여러모로 아니까 모른 척했는데 요새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네 죽여버린다고 떠들썩해
《어머니의 손수건》(이용남, 민중의소리, 2003) 133쪽
폐수가 흘러들어와 난리가 났었지요
→ 더럼물이 흘러들어와 큰일이 났지요
《하나뿐인 지구》(신영식, 파랑새어린이, 2005) 34쪽
동물들은 소리를 지르며 난리법석을 떨었어요
→ 짐승들은 소리를 지르며 북새판을 떨었어요
→ 짐승들은 소리를 지르며 왁자했어요
→ 짐승들은 소리를 지르며 시끌벅적했어요
《정글 파티》(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이경임 옮김, 시공주니어, 2006) 21쪽
벌레들은 허기져서 난리굿인데
→ 벌레는 배고파서 시끌판인데
→ 벌레는 배고파서 아우성인데
→ 벌레는 배고파서 들썩대는데
《충사 8》(우루시바라 유키/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07) 47쪽
왜 따라하고 난리야
→ 왜 따라하고 그래
→ 왜 막 따라해
《여자의 식탁 7》(시무라 시호코/장혜영 옮김, 대원씨아이, 2011) 59쪽
쳇, 그래. 난리도 아니었지
→ 쳇, 그래. 장난아니었지
→ 쳇, 그래. 엄청났지
→ 쳇, 그래. 시끄러웠지
《아냐의 유령》(베라 브로스골/공보경 옮김, 작가정신, 2011) 154쪽
걱정하느라 온종일 신경이 곤두서서 난리도 아니었잖아
→ 걱정하느라 온하루 마음이 곤두서서 장난도 아니었잖아
→ 걱정하느라 내내 마음이 곤두서서 힘들었잖아
《천재 유교수의 생활 31》(야마시타 카즈미/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12) 31쪽
진드기 한 마리에도 난리가 나는 거겠지요
→ 진드기 한 마리에도 법석이겠지요
→ 진드기 한 마리에도 시끄럽겠지요
→ 진드기 한 마리에도 떠들썩하겠지요
→ 진드기 한 마리에도 큰일나겠지요
《작고 느린 만화가게》(편집부 엮음, 작은것이 아름답다, 2017) 59쪽
노동자들에게 직접 주면 포퓰리즘이니 뭐니 하면서 난리가 나잖아요
→ 일꾼한테 바로 주면 꿀발림이니 뭐니 하면서 시끄럽잖아요
→ 일꾼한테 바로 주면 눈가림이니 뭐니 하면서 시끌시끌하잖아요
→ 일꾼한테 바로 주면 바람몰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떠들잖아요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인권연대, 철수와영희, 2018) 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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