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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자료

총(銃_도끼의 눈과 L.A. 폭동)

by 안녹산2023 2023.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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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의 한국 교민들이 총기를 구하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는 외신 기사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로드니 킹의 새로운 재판 결과에 대해서 제2의 폭동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전쟁과 사회 불안을 피해서 먼 미국 땅까지 찾아간 사람들이 이제는 총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한 아이러니가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사람만큼 총기와 관련 없이 살아온 사람들도 드물다. 총기를 구하려는 한국인이 그렇게 몰려들었다는 것은 그동안 총 없이 산 한국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총(銃)이라는 한자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원래 총은 도끼 자루를 그 쇠[金]에 끼우기[充] 위해 뚫어놓은 구멍을 뜻한 글자였다고 한다. 그것이 쇠로 만든 총 구멍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뒤에 와서 총을 의미하는 글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총을 보고도 장작을 패는 도끼 자루 정도를 연상한 순진성 때문인가. 임란 당시 일본인들이 화승총(火繩銃)을 앞세우고 쳐들어왔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조총(鳥銃)이라고 불렀다. 문자대로 풀이하면 조총은 사람이 아니라 새를 쏘는 새총이라는 뜻이다. 과연 사람을 죽이는 살상 무기를 상상조차 하기 꺼려했던 선비들 머리에서 나왔음직한 이름이다.

 

그러나 같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일본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총을 '다네가시마[種子島]'라고 불렀다. '다네가시마'는 일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총을 만들어 사용한 섬 이름이다. 어느 날 그 작은 섬에 중국 화물선 한 척이 표착했고, 그 배에는 화승총을 지닌 포르투갈 사람 두서너 명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멀리에 있는 물오리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본 그 섬의 영주가 총을 사들였다. 영주는 곧 칼 만드는 도공(刀工)을 시켜 그것을 그대로 본떠서 총을 만들도록 명령을 했고 그 도공은 갖은 고생 끝에 몇 자루의 총을 만드는 데 성공을 한 것이다. 일설에는 그 도공이 열일곱 살 된 자기 딸까지 바쳐 외국 선장으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것이 불과 10년도 안 되어 천 자루, 만 자루로 늘어나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는 거의 10만 자루 가까이 불어났다. 당시 유럽에 있던 총을 다 모아도 이 숫자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본인의 총 숭배는 '무뎃포'라고 하는 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일을 하는 행동을 뜻하는 말인데 그 말을 한자에 맞추어 쓰면 '무철포(無鐵砲)'가 된다. 즉 총 없이 행동하는 것과 무모하다는 말은 동의어가 되는 셈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뎃포총을 보내주십시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무사들을 보낼 때에는 전원 총으 휴대하도록 엄명을 내려주십시오."

 

임란 때 한 무장이 자기 영주에게 보낸 이 편지글을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이 전쟁터에서 의지해 왔던 것은 바로 그 총이었다. 

 

아무리 붓밖에 모르는 선비라 해도 총의 위력을 몰랐을 리 없다. 일본 병졸들로부터 빼앗은 총을 보고 그 소감을 피력한 당시 한국인의 말이 외국의 한 문헌에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야만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양질의 것은 쇠를 관통하고 사람을 쏘면 가슴을 뚫는다. 말 위에서든 땅 위에서든 총의 성능은 창에 비하면 열 배 이상이고 궁시에 비하면 다섯 배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 선비들은 우수한 총을 만들어 대결하기보다는 붓으로 그 총을 무력화하려고 했다. 임란 뒤 일본인들에게 주자학을 가르쳐주고(이황계열) 통신사로 하여금 문이 무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병마(兵馬)의 힘을 충효(忠孝)의 이념으로 바꿔놓은 도쿠가와 막부의 제도적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붓으로 총을 이긴다는 문승지효(文勝之效)로 일본인들은 그 막강한 총을 모두 버리게 되고 3백 년 동안 한일간에는 평화가 유지된다. 일본의 유학자 가운데는 반드시 머리를 서쪽에 두고 잠은 자는 사람도 있었다. 스승의 나라, 한국 땅을 향해 감히 발을 뻗고 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총의 나라라나느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미국은 '라이플(Rifle) 총 한 자루 옥수수 한 자루'로 개척한 나라이다. 그리고 온 시민들이 적대기가 아니라 바로 총자루를 들고 영국과 싸워 독립을 얻어낸 나라이다. 서부를 개척한 것은 곡괭이가 아니라 콜트(Colt) 연발 권총이다. 그러기에 미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총은 바로 남성의 명예이기도 하였다. '남자는 총 없이 다니느 것은 발가벗고 알몸으로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총은 미국 역사의 한 증인이며 미국 생활의 한 동반자이다. 현재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합법적 무기 소지자는 25만 명밖에 되지 않지만 실제로 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총 총기류는 2억 2천만 자루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전 인구와 맞먹는 숫자이다. 심지어 초 중 고 학생들이 다섯 명에 한 명꼴로 총기를 가지고 다니는 바람에 교실 입구에 금속 탐지기가 설치된 곳도 있다. 모자를 쓰고 다니지 못하도록 교칙으로 정한 학교도 있는데 그것은 모자 속에 총기를 감추고 다니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총을 '이퀄라이저(Equaliz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의미는 '상대와 동등하게 하는 연장', 즉 총을 가져야 남에게 꿀리지 않고 대등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총이 평등의 힘이 되는 미국은 결국 '총에 의한 총을 위한 총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 TV 뉴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것은 지붕 위에서 총을 들고 자기 점포를 지키는 용감한 한국 청년의 모습이었다. 이 강렬한 장면은 격렬한 흑인 폭동 장면을 배경으로 전 세계의 TV에 되풀이 되어 방영되었다. 특히 일본 텔레비전들이 이 장면을 계속 내보냈다. 한국인이 얼마나 호전적인 민족인가를 보여주기라고 하듯이. 그리고 흑인들의 총구가 자기네로 향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비켜간 것을 바랐기라도 한 듯이. 흑인 폭도들을 향해서 총을 들고 대결하고 있는 모습은 카우보이의 전통에 빛나던 그 백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두 자루의 총에서 십만 자루의 총을 만들어낸 다네가시마의 일본이들도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바로 총을 도끼 구멍이라고 하고 화승총을 조총이라고 불렀던 총 없이 살아온 바로 그 한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총을 든 한국인은 초라하다. 그러나 총을 붓으로 대결한 한국인이라면 세계의 거인이다. 우리가 약소 민족이 아니라 평화 민족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총 든 한국인보다는 붓을 든 한국인의 모습이 우리 이미지의 바탕이 되어야 하낟. 총기가 난무하는 미국 사회에서 그동안 한국인들이 어떻게 총 없이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총 대신 무슨 힘을 믿고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이 믿었던 문승지효가 시대 착오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한 흑 갈등은 총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한국인 슈퍼마켓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 때문이 아니었는가? 한국인은 결코 흑인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한국인은 어떤 인종과도 평화롭게 공존해 갈 수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주어야 한다. 

 

재미 작곡가 도널드 서가 흑인들의 역사와 애환을 그린 <노예 문서 Slavery Document>를 보스턴에서 발표했을 때 흑인 청중들은 수십 분동안 기립 박수를 보내며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총구멍에서 나오는 탄환보다 강한 힘이다. 그 노래의 탄환은 흑인의 가슴을 뚫었고 피가 아니라 감동의 눈물을 흐르게 한 것이다. 그 노래의 탄환이 지나간 가슴에는 감사와 이해와 사랑의 꽃이 핀다. 

 

혹시 누군가 흑인들을 향해서 '흑석동'이니 '연탄 장수'라고 부른 일은 없었는가. 그랬거든 "검은색은 아름답다"고, 이제는 <노예 문서>의 그 아름다운 합창곡을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조총

 

 

총이라 함은, 개인이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총포 가운데 일반적으로 구경이 작은 무기를 말한다. 총은 화약의 폭발력이나 압축공기의 팽창력, 또는 용수철의 탄성 등을 이용하여 발사물, 즉 총알이나 작은 화살 등을 한 개 혹은 여러 개 한꺼번에 발사하는 도구이다.

 

우리나라에서 총을 처음 제조한 시기는 고려 말엽인 1377년(우왕 3)경으로,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화약무기 연구와 제작을 맡은 화통도감(火熥都監)이 설립되면서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화약의 제조법은 최고의 비밀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화약기술자로부터 많은 어려움 끝에 중요한 기술을 배워 화약제조에도 성공하였다. 그 뒤 조선 초기까지 최무선과 그의 아들 해산(海山)이 대를 이어 우리나라의 화약무기를 발전시켰으나, 중국의 총을 모방하여 만든 당시의 총은 성능이 좋지 못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이르러 세종의 지시에 의하여 대개혁을 이룩함으로써 우수하고 독창적인 우리 고유의 화약무기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경희고소총통(慶熙古小銃筒)은 세종의 화기(火器) 대개혁 전에 사용되었던 총으로 현재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14세기 초에 사용되고 1861년 스웨덴의 로슐트(Loshult)에서 발굴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총과 같으며, 겉모양은 1372∼1379년에 중국에서 만든 소형총과 같다. 총구에서 속으로 들어갈수록 내경(內徑)이 좁아지다가 화약을 넣는 약통에서 다시 넓어지고 둥근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총은 한 번에 화살을 한 개씩만 쏠 수 있고 성능이 좋지 않다. 세종 때의 화약무기 대개혁은 이러한 나쁜 점, 즉 성능이 좋지 않고 한 번에 한 발 이상은 쏠 수 없는 점을 개량한 것으로, 세종의 대개혁 이후의 화약무기 체계를 보면 포(砲) 4종, 총 7종, 로켓 무기 4종, 폭탄 7종, 화차 2종 등이었다.

 

세종의 화약무기 대개혁은 총의 내부구조에 격목통(激木筒)을 만들고 격목을 끼워서 사용하는 방식인데, 이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독창적인 것으로서 개혁 전의 총에 비하여 사정거리가 2, 3배 늘어났고, 한 번에 최고 12발까지 화살을 넣고 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세종 때 개혁된 총의 구조는 총의 앞부터 취(觜), 격목통, 약통(藥筒), 모병(冒柄)으로 구성되어 있다. 취(부리, 주둥이)는 발사물, 즉 길이 22∼29㎝의 작은 화살(세전, 차세전, 세장전, 차세장전)을 넣는 곳으로 사전총통(四箭銃筒)은 세전 4발이나 차세전 6발, 팔전총통(八箭銃筒)은 세전 8발이나 차세전 12발을 끼울 수 있는 것이다.

격목통에는 원기둥 모양의 나무를 철추(鐵鎚 : 쇠몽둥이)로 박는데, 이는 약통 속에 넣은 화약의 폭발력을 강하게 하면서 여러 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인데 중간쯤에는 약통 속의 화약에 불을 붙여 주는 점화선(화약선)을 끼울 약선혈(藥線穴)이 있다. 약통 뒷부분은 막혀 있으며, 그 뒤에 모병, 즉 손잡이용 나무자루를 끼운다. 손잡이용 나무자루는 총을 쏠 때 잡기 위한 것이다.

 

총의 발사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총의 속을 청소한다.

② 약통에 점화선을 끼운다.

③ 약통에 화약을 넣는다.

④ 철추로 격목을 격목통에 박는다.

⑤ 취에 화살을 끼운다.

⑥ 총을 목표물에 조준한다.

⑦ 약선에 불을 붙인다.

⑧ 약통 속의 화약에 불이 붙은 뒤 화약이 폭발하며 화살이 격목과 같이 앞으로 발사된다.

 

당시 총의 종류는 이총통(二銃筒)·삼총통·팔전총통·사전총통·사전장총통(四箭長銃筒)·신제총통(新製銃筒)·세총통(細銃筒) 등 7종류가 있었다. 세총통의 길이는 14㎝로, 손잡이용 나무를 박을 수 없기 때문에 철흠자(鐵鎚子)라는 쇠집게로 총을 집어 사용되었던 것으로 지금의 권총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격목형총(激木形銃)은 1579년(선조 11)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만들면서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격목형총의 생명은 격목통에 잘 맞는 격목을 만드는 것인데, 당시의 총 제작기술로 볼 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발사 때의 준비시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승자총통은 격목 대신 진흙으로 화약과 발사물(箭이나 丸)도 사용할 수 있고 성공률도 격목형총보다 높았다. 청동을 주조하여 만든 승자총통의 내부구조는 총의 입구에서부터 화약을 넣는 약통까지 내경이 같은 형태이다. 승자총통의 종류에는 승자총통·차승자총통(次勝字銃筒)·소승자총통(小勝字銃筒)·별승자총통(別勝字銃筒) 등이 있었다. 차승자총통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총의 뒤쪽에 붙였던 손잡이용 나무 대신 지금의 현대식 총과 같이 개머리판을 달았고, 가늠자와 가늠쇠가 부착된 최초의 총이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승자총통 이외에 우자(宇字)·주자(宙字)·홍자(洪字)·황자(荒字)·일자(日字)·월자(月字)·영자(盈字)·측자(昃字) 총통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세종의 대개혁 때 제작된 이총통·삼총통·팔전총통·사전총통·사전장총통·세총통·신제총통의 또 다른 이름으로, 세종 때 제작해 놓은 총에다 음각으로 새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들 총들은 때에 따라 전(箭)이나 환(丸) 모두를 쏠 수 있었다. 아마도 토격(土激)으로 환을 사용하면서 구형총에 새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일본의 조총이 우리의 승자총통보다 성능이 좋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소승자총통은 총신이 길게 늘어났으며, 조총과 같이 점화장치를 실에 불을 붙여 방아쇠를 당기면 탄력에 의하여 불이 붙은 실이 총의 약통 옆에 붙어 있는 곳에 떨어져 약통 속의 화약에 불을 붙여 줄 수 있도록 개량된 화승총으로 발전되어 조선 말기에는 독립군의 주요 무기로 광복 전까지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38식·99식 소총이 사용되다가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미군의 M-1과 카빈소총들이 사용되었다.

현대의 총은 모두 탄창을 자동장전하여 발사하며, 크게 반자동식단발·완전자동식3발점사·완전자동식연속사격의 세 가지 방식이 있다. 그리고 점차 완전자동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1965년 국군이 월남에 파병되면서 미군으로부터 최신형 M-16이 지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 M-16을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발전시킨 K-1·K-2가 개발되었다.

 

불씨를 손으로 약선(藥線)에 붙이는 지화식점화법(持火式點火法)에서 화승식점화법(火繩式點火法)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방아쇠를 연한 화승물림쇠인 용두(龍頭)를 기계로 조립한 반자동식이어서 방아쇠를 당겨 용수철을 이용한 화승을 물린 용두가 화명(火皿)에 있는 화약에 점화함으로써 발사하는 과정으로 발전하였다.

 

《융원필비 戎垣必備》‘조총조’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화기가 모르는 사이에 살벌하고 뜻밖에 혹독함이 조총 같은 것이 없다. 조총의 힘은 능히 갑옷을 뚫고, 쏘면 그 명중함이 다만 활이 버드나무를 뚫는 것만이 아니다. 대저 이중(二重) 갑옷을 뚫는 날카로움이 그 총신이 긴 데 있다. 총신이 길면 화기가 새지 않아서 총알이 멀리 나가고 힘이 있다.

 

쏘면 능히 명중함은 나가는 총구가 곧은 데 있다. 총구가 곧으면 장약하는 데 적의하고 점화하여도 동요하지 않는 고로 능히 10발을 쏘면 반드시 8, 9가 명중한다. 즉, 나는 새가 숲에 있어도 모두 쏘아 떨어뜨릴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득명(得名)하였고, 이 때문에 조총이 이기(利器)인 것이다. 이는 기병이나 보병이라도 모두 쏠 수 있고, 귀한 바는 만들 때 연철(鍊鐵)을 숙정(熟精)시키고 총렬(銃列) 뚫음을 곧게 뚫어서 막힘이 없게 한 다음에라야 바야흐로 좋은 것이다.” 하였다.

 

조총은 15세기 말 유럽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 용두의 물림쇠가 항상 올라간 형태이고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용두가 화명에 접착하게 되어 있다. 그런 관계로 급속한 점화를 바랄 수는 없으나 폭발할 위험은 없는 이점이 있다.

 

이 점화법은 두 가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유럽의 일반적 화승총으로는 용두의 위치가 개머리판 쪽을 향하여 통상 우편측에 붙어 있고, 또 한 종류는 용두나 총구편으로 향하여 있는데, 이 후자의 형태가 16세기경 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인에 의하여 모로코를 경유하여 1543년 일본의 다네가섬(種子島)에 전래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1590년(선조 23) 3월 일본사자 히라요시(平義智)가 선조에게 조총을 진상하고 간 일이 있으며, 임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 9월 13일에는 이순신이 조총을 만들어 진중에서 시방(試放)한 뒤 조선 후기 후장식(後裝式) 소총이 도입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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