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프로레슬링이 사라진 이유
2023년 현재에도,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은 꽤 인기가 높다. 특히 월드레슬링엔터테인먼트(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는 야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 농구에 버금갈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방송에 정규편성 되어 있을 만큼 다수의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WWE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래서 일반 스포츠 경기와 달리 ‘쇼(Show)'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프로레슬링이 스포츠로서 인기가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쇼는 가짜일망정 ‘기술'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WWE팬들에게 승부의 결과는 큰 관심 대상이 아니다. 경기 중 펼쳐지는 선수들의 화려한기술이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을 자극해 대리 만족을 시켜 준다. 그뿐만 아니다. WWE의 경기에는 스토리가 있다. 마치 주말 연속극을 보듯, 이번 경기와 다음 경기가 일련의 스토리로 연결된다. 또 다른 인기 요인은 ‘다양한 캐릭터'다. 마치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선수가 즐비하다. WWE는 권선징악의 결말이 예정된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는 것과 비슷한 쾌감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프로레슬링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다. 다들 먹고살기 바빴던 1960~1970년대, 변변한 오락거리나 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에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삼삼오오 모이게 한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인기로 치면 요즘의 프로야구나 축구, 농구 등 웬만한 프로스포츠 경기에 댈 바가 못 되었다. 그런데 그런 프로레슬링을 일순간에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1965년 11월 27일 저녁, 서울 장충체육괸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장영철' 선수와 일본의 ‘오쿠마' 선수가 3전 2선승 제 경기를 벌였다. 한 경기씩 주고받아 경기 스코어가 1대1이 된 상황에서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오쿠마 선수가 장영철 선수를 코너로 몰아붙인 뒤 보스턴 크랩(Boston crab), 일명 ‘새우 꺾기'(누워 있는 상대편의 양다리를 잡아서 엎어 제치고 등에 압력을 가하는 공격 기술)라는 필살기를 시도했다. 기술은 완벽히 성공했고, 장영철 선수는 고통스러워했다. 원래 시나리오상에는 장영철 선수가 2대 1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공격은 잠시 뒤 중단되어야 했다. 그런데 오쿠마 선수가 각본을 무시하고 기술을 풀지 않았다. 링 밖에서 모습을 본 동료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해 링에 뛰어 올라가서 난투극을 벌였으며, 이내 경찰이 출동했고 경기는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장영철 선수는 돌발상황의 자세한 내막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로레슬링에 대한이해가 없던 경찰이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그럼 다 짜고 하는 거냐?”
라며 비아냥거렸고, 마침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가 프로레슬링의 독특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레슬링은 쇼”
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내보내면서 그 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 당시 대중은 프로레슬링 경기가 여타 격투기 경기처럼 100% 실제로 경기를 벌이는 줄 알았다가, 승부가 이미 정해진 쇼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 승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프로레슬링을 향한 대중의 관심은 싸늘히 식어 갔다.
결국 이 사건을 발단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은 급격히 몰락했다. 그런데다 1980년대에 컬러TV가 도입되고, 프로 야구와 프로 축구가 따라 출범하면서 프로레슬링은 대중에게 차츰 잊혀 갔다. 그날 경기에서 발생한 돌발상황이 이렇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당시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승부가 조작된 스포츠는 스포츠가 아니다.
한국 프로레슬링이 몰락한 이유는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을 일종의 ‘승부 조작'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승부 조작은 스포츠 경기에서 선수나 관계자가 경기 결과. 과정 등을 미리 정해 두고 승패. 점수를 조작하는 ‘범죄행위'다. 당시 대중은 프로레슬링이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정말로 있어서는 안 되는 ‘승부 조작'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서 팬들에게 큰충격을 안겨 주었다. 프로 스포츠 선수, 혹은 감독이 승부조작에 대거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 진 것이다. 빈번히 일어난 스포츠 승부 조작 사건은 불법 스포츠 도박과 맞물려 있다. 불법 스포츠 도박뿐 아니라 국가에서 운영하 는스포츠 복권마저도(경기 결과를 예상해 보면서 스포츠 관람의 즐거움을 극대화 하려는 본래의 취지에서 한참 벗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판으로 변질되면서 말썽이 나고 있다.
이 도박판에 연루된 선수와 감독의 해당경기 내용은 그야말로 꼴불견의 백태였다. 고의로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던지기도 했고, 골대를 벗어나는 슛을 날리기도 했으며, 적극적으로 수비를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일부러 상대편에게 맞아준 격투기 선수도 있었고, 의도적으로 주전 선수를 빼고 후보 선수를 기용한 감독도 있었다. 심지어 고의 패배를 지시한 감독도 있었다고 한다.
2010년, 최고 인기를 구가한 e-스포츠에서도 프로 게이머들이 주도적으로 승부 조작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e-스포츠의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불법 도박 브로커와 연계된 선수와 감독은 그동안 쌓아 온 명성과 명예를 한꺼번에 잃었으며, 선수나 감독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사실 더 큰문제는 승부 조작에 가담한 선수와 감독을 처벌한 뒤에 생긴다. 대중이 한순간에 프로레슬링 경기를 외면한 까닭을 생각해 보자.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경기가 운영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중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심지어 승부가 조작되었다면?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드라마'라고들 한다. 이는 스포츠의 승부는 예측할수 없다는 의미다. 그래서 관중은경기를 보면서 긴장감을 느낀다. 대중은 승부가 미리 정해진 경기에서 스포츠 본연의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또 스포츠는 승부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승리를 위해 선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애쓰는 과정에서 희열과 감동을 느낄 때가 더 많다. 그런데 자신이 관람한 경기에 ‘승부 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한편의사기극을 본 것처럼 관중은 자신이 우롱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프로스포츠는 관중이 외면하는 순간, 그 생명이 끝난다. 그래서 어떤 경기가 승부 조작에 연루된 것이 발각되면, 당국은 스포츠로서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한다. 2006년,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축구리그 ‘세리에A'가 충격적인 승부 조작 의혹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게 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명문 축구 구단인 ‘유벤투스 FC'에서 심판 배정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탈리이 축구협회(FIGC)는 부랴부랴 혐의가 의심되는 유벤투스 FC의 시즌 우승 기록을 무효로 하고, 챔피언스 리그 출전 자격을 박탈하는 등 매우 강력한 징계를 내렸다. 더 나아가 해당 구단을 2부 리그로 강등시키고 한동안 무관중 경기를 지시하는 등 승부 조작을 엄단한 바 있다. 구단 자체의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혹한 처벌이었다. 이것은 두 다시 승부 조작이 프로스포츠에 발붙이지 못하게 함으로써, 프로축구가 고사되는 위기만은 막아 보려는 읍참마속의 조치였다.
승부 조작과 채용 비리의 닮은 점
2018년 초 정부는 1,190곳의 공공 기관 및 단체 가운데 946곳에서 채용 비리가 적발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무려 80%에 달하는 곳에서 채용 비리가 암세포처럼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채용비리 형태는 외부청탁을 받은 경우가 가장 많았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관장의 입김이 공정한 채용을 가로막은 것이다.
공공 기관의 채용과정을 파헤쳐 보면 스포츠 승부 조작만큼이나 꼴불견이다. 자격미달의 지원자를 채용한 기관이 있고, 특정 지원자를 채용하기 위해 다른 지원자들을 들러리로 세운 기관도 있다. 가점을 받아야 할 대상자에게 가점을 주지 않으면서 탈락 시킨 사례도 적발되었다. 채용비리가 밝혀진 곳이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일이다. 공정한 채용과정을기대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응시생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금융감독원이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은행의 채용 비리도 국민에게 실망을 안긴 것은 매한가지다. A은행은 회장의 조카를 특혜 채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B은행은 특정 대학 출신의 지원자를 합격시키기 위해 면접 점수를 조작하기도 했다. C은행은 국회의원의 딸 두 명을 특혜 채용한 정황이 포착됐다.
공공기관이나 은행권은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이른 바 ‘꿈의 직장'이다. 많은 ‘취준섕'이 그곳에 취업하려고 몇 년씩 피땀 흘리며 준비한다. 정부가 나서서 채용 비리에 연루된 사람을 강력히 처벌한다고 한들, 각본대로 붙을 사람만 붙는 채용시험에 응시한 그들의 허망함과 분노를 제대로 보상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었다는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자본과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상
우리 사회에 만연한 채용 비리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결여를 여실히 보여 주는 명백한 사례다.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가능케 하는 구성원들의 공유된 제도, 규범, 네트워크, 신뢰 등 일체의 사회적 자산'을 포괄하여 사회적 자본이라고 지칭하는데, 이 중에서 단연 ‘사회적 신뢰'가 사회적 자본의 핵심으로 꼽힌다. 사회적 자본이 잘 갖춰진 나라일수록 국민 간의 신뢰가 높고 이를 보장하는 법. 제도가 잘 구축돼 있다. 그래서 국가의 미래 발전 가능성을 점칠 때 이 사회적 자본을 지표로 삼기도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채용 비리와 관련된 사건을 접하면 ‘우리는 아직 멀었구나.'라는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 승부가 조작된 경기를 외면하고 싶은 관중의 심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긴장감도 없고 기대할 것 없는 조작된 채용 과정은 응시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허망하게 만들고 맥 빠지게 한다.
공정한 경쟁 없이 소수의 사람에게만 기득권을 보장하는 사회는 승부의 결과가 정해진 스포츠 경기처럼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재미 없는사회다. 이탈리아 축구협회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인기 구단을 강력히 징계한 것처럼, 우리 사회도 아픈 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권이 부르짖는 ‘적폐 청산'이 아닐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 이 말이 단지 정치적 수사로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진정으로 바라는 바른 모습의 국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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