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승부를 거부한 크리켓
크리켓(cricket).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해도 세계적으로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 가운데 하나다. 얼핏 보면 야구와 비슷해 보이는 크리켓은 11명으로 이루어진 두 팀이 교대로 공격과 수비를 하고, 배트로 공을 쳐서 독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점차 발전을 거듭해 18세기 영국의 국기(國伎)가 되었다. 제국주의 시절 대영제국이 팽창함에 따라, 19세기에는 다른 나라로 널리 퍼졌다. 현재 국제크리켓평의회(ICC)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100여 개의 회원국이 가입되어 있다. 특히 크리켓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에서 인기가 높으며, 아시아권에서도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차택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는 스포츠다. 그 중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린다.
크리켓에는 특이한 경기 규정이 있어 눈길을 끈다. 경기 당일에 비가 오면 경기를 순연하지 않고 곧바로 제비뽑기의 일종인 ‘코인 토스(coin toss)'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동전 던지기'다. 크리켓과 비슷한 야구만 해도 우천 시 경기를 취소하고 다른 날로 경기 일정을 순연한다. 누군가는 ‘크리켓도 스포츠인데 친선 경기나 그렇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2014년 인천아시안 게임에서 이 규정이 적용되었다. 아시안 게임이라는 정식 국제 경기에서 말이다.
인천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9월 29일 크리켓 경기장. B조 조별 리그를 치르는 쿠웨이트와 몰디브는 오전 9시30분에 경기를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전날부터 오던 비는 그치지 않았고 경기는 계속지연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이제 동전 던지기도 승부를 가르겠습니다."
이윽고 심판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쿠웨이트는 앞면, 몰디브는 뒷면으로 정한 뒤 심판이 동전을 하늘 높이 던졌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동전은 앞면이 위로 향해 있었다. 쿠웨이트 선수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몰디브 선수들은 아쉬움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 동전 던지기 하나로 쿠웨이트는 대회 첫 승을 올리면서 조 2위로 8강에 오르는 기쁨을 맛봤다. 쿠웨이트에 패해 예선 탈락한 몰디브는 야속한 동전 때문에 아쉬움을 곱씹었다. 몰디브로서는 동전 던지기 패배로, 4년 간 피땀 흘려 준비한 아시안게임이 경기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동전 던지기로 승패를 결정하는 일은 경기를 4년간 준비해 온 선수들에게 힘 빠지고 어이없는 상황이 분명하다. ‘동네 운동회도 아니고 국제 대회인데 겨우 비가 온다고 동전에 운을 맡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는사람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다른 종목에서도 동전 던지기로 승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꽤 있다. 예를들어 축구에서는골 득실 차와 득점수까지 모두 같을 경우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최후에는 동전 던지기로 승패를 결정한다. 또 양궁도 동점 상황에서 승부를 가르기 위한 ‘슛 오프'(운동 경기에서 정한 횟수 시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을 때, 횟수 시간을 연장해 계속하는 경기)를 반복하는데, 그래도 동점일 때 결국 동전 던지기로 승패를 가린다.
이처럼 스포츠 현장에서는 일차적으로 승부를 내려 노력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최후의 방편으로 제비뽑기를 활용하기도 한다. 인천아시안게임 크리켓 경기는 개회식 다음 날인 9월 20일부터 폐회식 전날인10월 3일까지 숨가쁜 일정으로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종목은 휴식일이 있거나 우천 여부와 상관없는 실내 경기라 순연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켓은 휴식일이 없어서 순연이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공이바운드 해야 정상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동전 던지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실력이 아닌, 뜻밖의 확률에 의지하는 제비뽑기는 스포츠만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서도 심심찮게 활용된다. 2015년 캐나다 한 선거에서는 동전을 던져 당선자를 결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캐나다 동부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에서 실시한 주의원 선거 결과, 공교롭게도 두 후보의 득표수가 1,173표로 같았던 것이다. 이런 경우 선거법은 동전 던지기로 당선자를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입회 판사는 곧 동전 던지기를 실시했다. 관련 법 규정을 세부적으로 따지면 후보성의 알파벳 순서가 앞선 쪽이 동전의 앞면을 배정받기 때문에 맥카이삭(Mcisaac) 후보는 뒷면을 배정받았고, 맥키니스(Mcinnis) 후보가 앞면을 배정받았다. 결국 던진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서 맥카이삭 후보가 당선자로 결정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성이 비슷해 네 번째 알파벳까지 따지는 바람에 이 결과는 더욱 더 극적이었다. 맥카이삭 후보는 당선이 확정된 뒤 이렇게 말했다.
"공중에 던져진 동전이 의자 밑으로 떨어졌다가 튀어 오르는 짧은 순간 몹시 긴장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결과를 받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014년 페루 필핀토 시장선거에서도 두 후보자의 득표수가 같아 동전 던지기로 시장을 결정한 사례가 있다. 그보다 3년 앞선 2011년 미국 일리노이주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 시카고 지역 소도시의 시의원 선거에서 두 후보가 같은 득표수를 기록하자, 동전 던지기로 당선자를 정한 것이다. 일리노이주 선거법 역시, 두 후보의 득표수가 같을 때 동전 던지기나 제비뽑기로 당선자를 가린다는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이런 중요한 선거를 제비뽑기 같은 방식으로 결정짓는 일이 과연 올바른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제비뽑기 관행은 오랜 전통을 가진다. 직접민주제를 시행하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은 한곳에 모여 토론하며, 대표자를 제비뽑기로 선출했다. 아테네인들이 공직자를 선출하는 데 제비뽑기 방식을 택한 이유가 단순히 대중의 흥미를 끌 목적은 아닐 테다. 또 대의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대표 선출을 운이나 신의 결정에 따른다는 신성한 뜻은 더욱 아니다. 제비뽑기의 목적은 바로 모든 출마자에게 공정한 기회를 완벽하게 보장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런점에서 보면, 근대 이후 성립한 선거제도에 따른 오늘날의 대표 선출방식이 오히려 민주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상 소수 특권층에게만 피선거권이 주어지면서 과도한 경쟁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당선을 위해서라면 부패도서슴지 않는태도가우리 사회에 만연하 다. 또 소수에게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 대부분은 정치에 무관심해지기 쉽다.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 제비뽑기로 대표자를 선출할 때, 그들은 재임 기간을 명확히 제시하고 연임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출자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해관계 를 떠나 소신 있게 일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선거는 제비뽑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선거법은 후보자들의 득표수가 같으면 동방예의지국답게(?)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연장자가 승리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선거가아닌, 고대 그리스 방식인 제비뽑기로 대표를 선출한다면 공직자의 비리나 부패 등이 사라질 수 있을까?
정치뿐만 아니라 자칫 민감할 수 있는 병역 문제를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타이의 징병 검사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진풍경이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검사장에 모인 젊은 남자들이 제비를 뽑고 군인에게 건넨다. 그 순간 검은색 제비를 뽑은 청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빨간색 제비를 뽑은 청년들은 낯빛이 어두워진다. 검은색은 군복무 면제를, 빨간색은 입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타이는 징병 대상인 스물한 살 남성 인구가 군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보다 많아 지자, 1954년부터 추첨제를 도입했다. 먼저 자원 입대자를 받은 다음, 모자라는 인원을 제비뽑기로 선발하는 것이다. 입대 대상자를 어떤 방식으로 정하든 공정성 시비에서 벗어날수 없으니, 차라리 제비뽑기를 통해 공정하게 입대자를 선발하자는 취지로 시행됐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제비뽑기로?
제비뽑기를 단순히 사행적인 오락거리로, 혹은 주술적이고 비과학적인 미신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나 우리 사회에서의 다양한 쓰임새를 보면, 제비뽑기를 그리 불합리한 행위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비뽑기는 어떤 문제에 당면했을 때 인간으로서 강구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동 원하고, 그러고 나서도 묘안이 없으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방지하고자 최후에 행하는 방법이다. 오로지 운에 맡긴다는 점에서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공정성을 기준으로 보면 달리 생각해 볼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관계가얽힌 사람들의 이견과 불만을 최소화할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인 것이다. 제비뽑기는 극심한 경쟁이 일어나거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사안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이를 제비뽑기로 해결하면 의외로 투명한 결과가 나올 기능성도 있다. 중요한 스포츠경기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제비뽑기를 활용하고 있는 선례를 통해 그 해결의 단서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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