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철도 : 인 부 의 남 원
인 : 경인선(1899.9)
부 : 경부선(1904.12)
의 : 경의선(1906.4)
남 : 호남선(1914.1)
원 : 경원선(1914.9)
1. 경인선(1899 서울 - 인천)
경인선이라 함은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역과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역 사이에 부설된 철도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서울특별시구로역에서 인천광역시인천역 간의 총 연장 27.0㎞의 복복선철도이다. 경인공업지대를 관통하면서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고 있으며 수도권 운송 체계의 중요한 축에 해당한다.
1896년(고종 33) 미국인 모스(Morse, J. R.)에게 그 부설권이 특허되어 이듬해 3월 22일 기공되었고,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 간 최초의 영업을 개시한 이후 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합자회사(京仁鐵道合資會社)가 완공시켜 개통되었다. 처음에는 회사이름을 따서 ‘경인철도’라고 불리다가 일본으로의 국유화가 진행된 1906년 이후부터 ‘경인선’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 기관의 도입과 함께 구미 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구체적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역사적 흔적을 남기는 일이 되었다.
이 철도의 부설권이 미국 상인 모스에게 특허된 것은 경인선을 부설할 때 일본의 철도체계인 협궤식(狹軌式)을 채택하지 않고 영국이나 미국의 표준형을 택한 것과 함께 주미대리공사(駐美代理公使) 이하영(李夏榮) 등을 통한 미국의 영향이 일본의 주장을 압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이 실추된 역사적 사실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철도 부설 공사는 결국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그 이유는 모스가 본국으로부터의 자금 조달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간파한 경인철도인수조합은 조선 정부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모스와 경인철도양도계약(京仁鐵道讓渡契約)을 체결하고 1898년 12월 17일모스에게 사정 가격 170만 2천원(엔)을 지불함으로써 경인철도의 부설권은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다.
모스로부터 일체의 권한을 인수한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두 번째 기공식을 인천에서 가졌다. 공사는 급속히 진행되어 그 해 전반부에 이미 인천∼한강 간의 토목공사가 끝났고, 6월 10일부터 궤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여 19일 철도 건설 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 해 9월 18일 마침내 노량진~인천 간 약 33.8㎞ 구간에서 임시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철도의 효시가 되었다. 이어 한강 북안에서 경성역(이후 1905년 서대문역으로 명칭 변경)까지 약 3㎞의 공사는 1900년 5월 26일에 착수되어 7월 5일한강철교의 준공과 함께 완성되었고, 7월 8일 경성역∼인천역 간의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리하여 1900년 11월 12일경성역 인근에서 경인선 전 구간의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가설된 한강철교는 경인선 부설 공사 중 최대 난공사였는데, 홍수와 혹한으로 몇 차례 공사를 중단해 가면서 연 270일에 걸쳐 완공하였다. 한강철교는 그 상부가 미국제 약 70m짜리 단선 플레이트형 교항(橋桁) 10개로 이루어졌으며, 너비 약 5.1m, 높이 약 11.3m, 길이 약 628.8m이었다. 그리고 하부는 2개의 교대(橋臺)와 9개의 교각(橋脚)으로 되어 있는데, 교대는 화강암, 교각의 수면 부분은 화강암, 기타 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이 한강철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교이며 당시로서는 가장 긴 다리이기도 하였다.
경인선의 선로는 전 구간을 통하여 대체로 지세가 평탄한 곳이기 때문에 터널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경인선을 처음으로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Brucks社)에서 만든 모가형[Mogul型] 탱크기관차였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선로 개량 공사가 행하여졌으며, 그 결과 경인선 선로 연장은 구선로(舊線路)에 비하여 1.6㎞가 짧아졌다. 이때 용지·토공·교량·구교(溝橋) 등 복선화 준비가 동시에 행하여졌으나, 복선화 공사는 다른 군용 철도의 건설에 밀려 뒤로 미루어졌다. 그리하여 경인선의 복선화는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1965년 1월 12일동인천∼주안 간이, 같은 해 9월 18일주안∼영등포 간이 복선 개통되었으며, 영등포∼용산 간 및 용산∼서울 간의 복선 공사는 1969년 6월과 9월에 각각 완성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수도권 전철화 계획으로 구로∼인천 간 27.0㎞가 서울∼수원 간 41.5㎞, 용산∼성북 간 18.2㎞와 함께 전철화되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히 진전된 공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수도권의 기능지역이 평면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부터 경인선은 서울∼인천을 잇는 경기도 서부 지역의 발전축으로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어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고, 구로공업단지가 성장하여, 서울시로 편입되었으며, 인천은 광역시로 발돋움하는 등, 이 지역의 성장은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경인선은 기존의 복선만으로 많은 교통량을 모두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선로용량을 확대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0년에 복복선화 사업이 착수되었다. 구로·부평 구간은 1999년 1월에, 부평·주안 구간은 2002년 3월에, 주안·동인천 구간은 2005년 12월에 각각 복복선으로 개통되었다. 복복선 개통으로 가운데 내선에는 급행열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계획에는 경인 급행선의 수인선 송도역까지의 연장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인천역의 급행선 플랫폼은 지하에 건설 중이다.
2. 경부선(1905.1)
경부선이라 함은 서울과 부산 사이에 부설된 복선철도를 말한다. 1901년 8월 20일에 서울 영등포에서, 같은 해 9월 21일에 부산 초량에서 일본 자본의 회사인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4년 후인 1904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1905년 1월 1일을 기하여 전선(全線)의 영업이 개시되었다. 그 해 5월 25일에 서울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광장에서 개통식이 거행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경인선(1899년 9월 18일 개통)에 이은 두 번째의 철도 개통이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체제 구축이 철도 부설 및 채광권 획득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부선의 부설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이었다.
1894년 ‘한일잠정합동조관(韓日暫定合同條款)’으로 경부선 철도 건설에 관한 문제가 조약 문서상에 나타나고, 1898년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으로 경부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인 회사에 강압적으로 특허되기까지 일제는 민간인을 앞세워 비밀리에 그 기초 공작을 진행하였다. 즉 일본인 마쓰다(松田行藏) 등은 1885년(고종 22)에 내한하여 4년에 걸쳐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교통·민정 및 경제 상황을 은밀히 조사하였다. 이어 내한한 일본인 철도기사 고노(河野天端) 등도 당시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 무로다(室田義文)의 비호 아래 사냥꾼으로 가장하고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 예상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뒤 측량 도면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2년에 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
원래 서울∼부산 간에는 동로·중로·서로의 3개 도로를 비롯하여, 전라가도·경상가도·삼남가도 등의 교통로가 있어 처음 노선 계획의 기준이 되었으나, 이들 중 어느 한 도로를 따라 건설하는 것은 지세 등의 제약 조건 때문에 어려웠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제적 조건을 중시한 데다 경쟁 철도의 출현을 피한다는 입장에서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절충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공사의 진행은 우리나라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및 화폐의 차이 등으로 많은 난관에 부딪쳐, 1902년 말까지 북부에서는 51.5㎞, 남부에서는 53.1㎞만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일제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공사를 서둘러 강행하였고, 그 결과 졸속공사를 면할 수 없었다.
경부선이 개통되자 같은 해 9월 11일에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을 매체로 경부철도와 일본철도를 연결하는 연대 운수가 개시되었다. 또한 같은 해 11월 10일에는 경부철도와 군용철도인 경의선(서울 용산∼신의주간)의 연락 운행이 시작되었고, 11월 11일에는 군용철도 마산포선이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군용 철도 시대의 막을 열게 되었다.
경부선의 개통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토의 공간 거리가 시간적으로 크게 단축되었으며 이것은 그 뒤의 국토 발전에 하나의 큰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그러나 그 근본 목적은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 수탈 정책을 뒷받침하고, 이어 1905년 4월 28일 개통된 경의선과 함께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어서 결국 경부선의 개통은 그 길을 닦은 셈이 되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뒤에는 수송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일제는 그 동안의 시설 보수에서 한 걸음 나아가 1936년에 경부선 복선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전∼영등포 간의 복선 공사는 1939년에, 부산진∼삼랑진 간은 1940년에 완공되었고, 삼랑진∼대전 간 복선은 1940년 공사에 착수하여 더욱 치열해진 전쟁 중인 1944년 10월에 준공되었다.
수원∼천안간의 복복선화와 전철화가 진행되어 2003년 4월에는 수원∼병점 구간이 1차 개통하였고, 2005년 1월에는 병점∼천안간이 복복선화되어 천안까지 통근형 전동차의 운행범위가 확대되었다. 이와 함께 기존의 서울∼수원 간 직통열차가 서울(용산)∼천안 간 급행열차로 바뀌어 서울역과 천안역을 86분에 이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전구간 전철화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광복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부선은 격동을 겪었으며, 뒤이은 사회·경제적 발전에 유통의 대동맥 구실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경부선은 곳곳의 도시에서 간선 및 지선철도의 형태로 주요 산업단지와 공업단지를 연결하고,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고 있다.
3. 경의선(1906.4)
경의선이라 함은 서울과 평안북도 신의주 사이에 부설된 철도를 말한다.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는 우리나라 관서 지방을 관통하는 종관철도(縱貫鐵道)로서 총 연장 499㎞이다.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로 연결되고 있으나,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서울∼문산 간의 52.5㎞만을 운행하고 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목적으로 부설하였다. 경부선과 함께 평시에는 원료 공급, 공업 제품의 수송을 맡았으나, 전시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노선으로 이용되었다.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Morse, J. R.)가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한 데 자극된 프랑스는 1896년 7월 친로파 대신 및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C.)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피브릴르회사(Fives Lile會社)의 대표 그릴르(Grille)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하게 하였으나, 그릴르는 재력 부족으로 부설권을 상실하였다(1899.6.23.). 이에 우리 정부는 당시 국내에서 일고 있던 애국 계몽운동에 힘입어 반환된 경의선 부설권을 1899년 7월 8일 박기종(朴琪淙)이 주도하는 대한철도회사(大韓鐵道會社)에 특허하였다. 그러나 재력이 없던 박기종이 실패하자 정부는 외세를 배격하기 위하여 경의선·경원선을 궁내부 직영으로 하였다.
1900년 9월 조정은 내장원(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두고 조병식(趙秉式)을 총재로 임명하고 서울∼개성 간의 선로 측량에 착수하게 하였다. 이때의 계획은 먼저 서울∼개성 간을 개통시키고 자금이 확보되는 대로 연장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정부가 스스로 착공하고 있는 데도 일본과 러시아는 경의선 부설에 계속 상관하였다.
그러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지 보름 뒤인 1904년 2월 21일, 일본은 서울∼신의주 간의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를 설치하고 3월 4일 이 감부 소속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그 해 3월 12일 정부는 군사상 필요하다는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50년간의 임대 조약을 맺고 일본에게 경의선 부설권을 물려주고 말았다.
철도 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군인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공사를 급속도로 진행시켰다. 실제 답사를 통한 정밀한 조사를 하지 못한 채 5만 분의 1 지형도로만 위치를 결정하고 측량을 하였다. 1904년 3월 12일 용산∼개성 사이, 4월 9일 개성∼평양 사이, 6월 25일 평양∼신의주 사이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0월 28일 용산∼임진강 사이에 철도건설을 위한 임시 열차가 운행되었다.
1905년 1월 26일 평양∼신의주 간의 철도가 완성되었고, 3월 29일 대동강철교가 준공되었으며, 4월 28일 청천강·대령강의 두 철교를 제외한 전체 노선이 준공되어 이날부터 용산∼신의주 간에 연락 운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1906년 3월 25일 가장 난공사 지역인 청천강철교가 준공됨으로써 전선에 걸쳐 열차가 운행되었다. 경의선 건설에는 총 733일이 소요되었으며, 하루 평균 730m의 선로를 부설한 셈이다. 큰 터널은 파지 않고 우회하였으며, 교량도 부실하여 공사비가 적게 든 반면 졸속 공사가 되었다. 특히, 철도용 부지를 무료로 강점하고 공병대를 투입하여 경비가 더욱 경감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상 목적으로 급조된 경의선은 그 뒤 대대적인 개량공사가 필요하였다.
철도감부는 1905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구배의 완화, 곡선의 개량, 터널 신설(19개소, 540m), 교량의 개증축(328개소) 등 개량 공사에 착수하여 1911년 11월 개량 공사의 대부분을 완공하였다. 그 결과 전선을 통하여 최급구배 100분의 1, 최소 곡선 400m의 선로로 되었으며,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한국∼만주 간이 철도로 연결되었다. 또한, 각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安東)까지 연장하고, 서울 남대문과 만주의 장춘(長春) 간을 주 3회씩 직통 급행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환이 형성되었다.
4. 호남선(1914.1)
호남선이라 함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전조차장역과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역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를 말한다. 호남지방은 비옥한 평야의 곡창지대인 동시에 긴 해안선이 있어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그리하여 호남지방의 서부를 관통하는 호남선은 우리나라의 간선철도인 경부선·경의선·경원선에 비하여 정치적·군사적 중요성이 덜한 반면 경제적 유용성이 큰 노선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철도 부설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896년 프랑스 휘브릴회사의 그리루가 서울∼목포간 경목선부설권(京木線敷設權)을 우리나라 정부에 요구한 것이 철도 건설의 시초이다. 이후 일본·영국에서도 철도부설을 요구해 오자, 우리 정부에서는 1898년 8월 호남선관설안(湖南線官設案)을 의결하여 독자적으로 선로를 부설하고자 하였다. 1904년 5월 서울에서 목포에 이르는 철도를 부설하려 하였으나, 수원·천안·대전을 경유하여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경부선 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에 넘어감에 따라 독자적인 간선철도 부설에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주관 아래 경부선의 지선 형식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7월대전∼연산간 39.9㎞를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연산∼강경 구간(1911년 11월), 강경∼이리 구간(1912년 3월), 이리∼김제 구간(1912년 10월), 김제∼정읍 구간(1912년 12월), 나주∼학교 구간(1913년 7월), 학교∼목포 구간(1913년 5월), 광주송정∼나주 구간(1913년 10월), 정읍∼광주송정 구간(1914년 1월)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1914년 1월 22일 총 260.6㎞의 호남선 전통식이 목포에서 거행되었다.
이렇게 개통된 호남선은 호남지방의 미곡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호남선의 주요 지점에 미곡 집산지가 들어섰고, 미곡 적출항으로 연결되는 지선도 개통되었다. 대전역에서 호남선과 경부선을 연결할 때 서울방향이 아닌 부산방향으로 접속한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1968년 1월 4일 복선화 공사를 착공하여, 1969년 6월 1일 두계∼개태사간 9.4㎞를 개통한 것을 시작으로, 1978년 3월 30일 대전∼이리간 88.6㎞의 복선 완료 개통식을 가졌다. 그 뒤 이리∼정읍간 43.4㎞를 1985년 11월 15일에, 정읍∼장성간 32.4㎞를 1987년 12월 4일에, 장성∼광주송정간 21.9㎞를 1988년 9월 6일에 각각 준공하였다. 광주송정역에서 목포역까지의 복선화는 2003년 12월에 완료되었다.
2004년 4월 전철화가 완료되었으며 고속열차가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장항선이 군산을 경유하여 익산역까지 연장됨에 따라 장항선 열차의 일부는 서대전역까지 운행하고 있다. 호남선은 서대전역에서 대전선과 연결되고, 채운역에서는 강경선과, 익산역에서는 전라선 및 장항선과, 안평역에서는 장성화물선과, 광주송정역에서는 경전선 및 광주선과 각각 연결된다.
5. 경원선(1914.9)
경원선이라 함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와 북한의 강원도 원산시 사이에 부설된 철도를 말한다. 1914년 9월 6일 개통되었으며, 총 연장은 223.7㎞이다. 강원도 철원·안변을 거쳐 원산시에 이르나 지금은 국토의 분단으로 서울 용산역에서 경기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백마고지역까지의 94.4㎞만 운행하고 있다.
경인선과 함께 국토를 가로질러 수도 서울과 동·서해를 잇는 간선 철도로, 함경선과 이어져 두만강 연안에 이르고, 국경을 지나면 대륙 철도에 접속되어 산업·군사상 막중한 위치를 점한다. 서울과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였던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이나 경목선(京木線: 지금의 호남선)에 비하여 결코 작지 않았다. 따라서, 그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외교전 역시 매우 치열하였다. 1896년 9월 30일, 프랑스의 피브릴르회사(Fives Lile會社)가 주한 프랑스 대사를 통하여 경원선과 경목선 부설권을 청구하였으나, 우리 조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8년 8월 1일 독일 총영사 크린(Krien,F.)이 한국 외부대신에게 경원선 부설권을 그들이 세운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에 준허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독일측은 경인선과 경의선의 부설권이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 허여된 사실을 들어 같은 요구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철도 부설 자금의 공급권이라도 얻어내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경인선과 경부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여 공사에 들어간 일본도 경원선부설권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경원선 부설권이 일단 다른 경쟁국에 넘어갔을 경우, 그것이 그들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기회를 엿보다가 1899년 6월 17일 대리공사 하야시(林權助)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즉각 거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줄기찬 외교적 압력에 대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일관하여 내세운 원칙은 ‘철도와 광산 경영은 일체 이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1899년 6월 17일 정부는 경원선의 부설을 박기종(朴琪淙) 등의 국내 철도 회사에 허가하고, 그 달 24일 이를 관보로 공포하였다. 9월 13일 궁내부내장원(宮內部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선과 경원선의 건설을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철도 직영 방침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국내 철도 회사는 1899년 7월 21일동소문(東小門) 밖 삼선동(三仙洞)을 기점으로 하여 원산가도를 따라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비우점(碑隅點)에 이르는 약 40㎞ 구간에 대하여 선로 측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금 사정으로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일본은 경의철도자금대부약관의 부수 약관에 들어 있던 ‘경원철도부설을 위하여 기채(起債)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의무 조항을 교묘히 악용, 경원선에 대한 출자 권리를 내세우고, 한편으로 경원군용철도론을 내세웠다. 1904년 6월 29일부터 시작하여 서울~원산 사이 철도 부설 노선 답사를 한국 정부의 제지 없이 마친 일본은 그 해 8월 27일 경원선을 군용 철도로 부설하기로 결정하여 발표하였다. 그리고 주한공사를 통하여 ‘일본의 경원선 부설과 경쟁 또는 병행하여 다른 철도를 부설하지 말 것’과 ‘토지 수용 등 필요한 편의를 제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경원선 부설은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의 마수에 식민지 경영 수단으로 빼앗기고 만 것이다.
1910년 4월 용산쪽에서부터 선로 측량이 시작되어 그 해 10월 15일 용산에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듬해 3월 다시 원산쪽에서 측량을 시작, 10월에 기공하였다. 1911년 10월 15일 용산~의정부 구간 31.2㎞가 처음 개통되었고, 1914년 8월 14일 세포~고산(高山) 구간 26.1㎞가 개통됨으로써 222.7㎞의 전 노선이 완공되었다.
1904, 1905년 러일전쟁 무렵에 건설하게 된 용산 방면 약 6.4㎞와 원산 방면 약 12.9㎞의 노선을 제외하면 모두 새로 건설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년 9월 16일 원산에서 경원선 전통식(全通式)이 거행되었다.
경원선은 추가령구조곡의 지구대(地溝帶)를 따라 건설되어 고산협곡의 험준한 지형적 장애를 상당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령산지를 비껴 넘어야 하였고 기존 도로가 불비하였기 때문에 공정 전반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 경술국치 직후라 민간인과 의병들의 저항과 습격이 잦았다고 한다. 일본인 측량대가 헌병대의 비호 아래에서도 한복으로 위장해서야 측량을 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운행 초기에는 운송 실적이 저조하였으나, 연변에 금강산·석왕사(釋王寺)·원산해수욕장 등의 관광명소가 있어, 철에 따라 객차를 늘리거나 임시 열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1928년 9월 1일원산과 상삼봉(上三峯)을 잇는 함경선이 개통되어 경원선과 연결되자, 3∼7일씩 걸리던 서울~회령 간이 약 26시간, 서울~청진 간이 약 22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그만큼 경원선의 구실도 커졌다.
또, 1931년 7월 1일 철원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선이 개통되자 경원선 승객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래 군사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연변의 산업이 부진한 데다 그 개발이 철저히 도외시되었기 때문에 운송 실적은 대체로 저조하였다. 광복 후 동북 지방의 개발이 활발해지자 큰 몫을 할 수 있었던 경원선은 국토 분단으로 원산까지의 운행은 중단되었다. 1967년 9월 한 달 동안에 세 번씩이나 무장 간첩에 의하여 폭파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82년 3월 18일 경원선 복선전철화사업이 시작되어 1986년 9월 2일 성북~의정부 사이 13.1㎞가 완공됨으로써 수도권 전철 구간을 포함, 용산~의정부 사이 31.2㎞가 복선전철화 되었다. 경원선은 용산에서 경부선·용산선과 갈라진 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과 나누어지고, 다시 의정부에서는 서울 교외선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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