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1 : 삼 복 은
삼 : 삼례집회
복 : 복합상소
은 : 보은집회 (종교집회에서 정치집회로 발전)
고 : 고부민란
무 : 무장봉기
백 : 백산봉기
토 : 황토현 전투
장 : 장성황룡촌 전투
전 : 전주점령
교 : 교정청설치
경 : 일본 경복궁점령
청 : 청일전쟁
갑 : 1차 갑오개혁 단행
우 : 우금치 전투
2 : 2차 갑오개혁
1. 삼례집회(종교집회)
삼례집회라 함은 1892년(고종 29) 11월에 동학교도들이 삼례에서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죄명을 벗기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개최한 집회를 말한다. 삼례 집회는 1892년 10월 공주 집회와 연계하여 제2차 교조 신원 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1892년 10월에 동학교단 지도 세력들이 충청도 공주에서 집회를 개최해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충청 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제출했다. 조병식이 교조 신원은 조정의 일이므로 자신에게 권한이 없지만 탐관오리의 처벌과 수탈 금지는 약속한다는 답변을 얻었다. 이에 수탈이 심했던 전라도에서도 교조 신원 운동을 통해서 공주 집회와 같은 성과를 얻고자 했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전라 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경직은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는 약속할 수 있지만 국법으로 동학을 금지하고 있어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답변서를 동학교단에 보냈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반발했지만 손천민을 비롯한 지도부의 설득으로 해산하였다.
삼례 집회는 동학교도들이 탐관오리의 처벌과 수탈 금지를 내세우면서 현실적인 정치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 상소 운동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 복합상소
공주와 삼례에서 행한 동학교도들의 신원운동은 당초 요구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지방 수령들의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동학교도들에 대한 부당한 침학행위를 말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충청감사와 전라감사로부터 얻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충청·전라 양 감영의 공문은 별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공인문제와 교조의 신원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학교단 지도부는 교도들을 더욱 조직화하여 중앙 조정을 향한 신원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양 감영에서 모두 동학의 공인문제는 중앙 조정의 권한이라 언명하였기 때문이다.
중앙 조정을 향한 복합상소 계획은 이미 삼례취회 단계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삼례취회를 결산하는 1892년 11월 19일자 동학 지도부의 敬通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임금님께 복합할 계획은 방금 상의해서 다시 도모하려 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리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통 내용은 광화문 복소가 공주·삼례 신원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준비되었음을 보여 준다. 동학교단 지도부는 우선 1892년 12월 6일경 복합상소에 대비한 도소를 충청도 報恩 帳內에 설치하였다. 12월 6일 도소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실린<本敎歷史>에 의하면, “당시 도소를 설치하자마자 각지로부터 오는 교도의 수가 폭주하여 迎送과 사무처리가 폭주했다”고 전한다. 광화문 복합상소 계획은 이같이 몰려드는 민중들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학지도부는 1차적으로 도소에 몰려드는 교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12월 6일자로 도소출입을 제한하는 경통을 보냈다. 그러나 복합상소는 쉽게 실행되지 못했다. 복합상소에 대한 지도부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복합상소 계획에 대해 최시형의 허락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복합상소의 성과가 어떻게 나타날 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복합상소를 전후한 탄압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동학 지도부는 12월 중순께 서울로 직접 올라가지 않고 중앙 조정에 소장을 올렸다. 첫머리에서 “道란 사람으로서 다같이 행할 바를 이름한 것이니 邪가 있고 바름이 있으며 같음이 있고 다름이 있는 것은 모두가 사리를 바르게 구한 것이니 헛된 판단만이라 할 수는 없다”고<朝家回通>이라는 상소장에서 지도부는 東學이 이단이 아님을 역설하고 충청도·전라도 지역에서 관리들의 탐학을 열거하면서 조정의 공평한 조처를 요청하였다. 동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관리들의 탐학금지를 요구하는 이같은 상소에 대답이 없자, 동학 지도부는 상경투쟁인 복합상소를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1893년 1월 淸州 松山에 있던 孫天民의 집에 奉疎都所가 설치되었다. 봉소도소의 임원은 姜時元·孫天民·孫秉熙·金演局·徐丙鶴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복합상소 계획을 각 지역에 알린 다음, 2월 초순경 서병학을 먼저 서울로 보내 都所를 정하는 문제와 숙소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서병학외 다른 지도자들은 2월 8일 과거보러 올라가는 선비차림으로 분장하여 일제히 상경했다. 이 무렵 서울에는 동학교도 수만 명이 외국인을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복합상소 당시 상경한 동학도의 수는 분명치 않다. 수만 명이라는 기록도 전하지만 당시 일본≪東京日日新聞≫이 게재한 수백 명 정도가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복합상소는 2월 11일부터 시작됐다. 광화문 앞에 출두하여 복소한 인원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9명에서부터 80여 명에 이르기까지 분분하지만 대체로 동학지도부의 주요 인물들과 중견 동학지도자 40여 명이 복소에 나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朴光浩를 疎首로 한 복소참여자는 13일까지 3일동안 상소문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상을 받들고 광화문앞에 나아가 엎드려 호소했다. 상소절차의 잘못을 들어 상소접수조차 거부하던 중앙정부는 14일 ‘집으로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면 원하는 바를 따라 해주겠다’는 내용의 傳敎를 내렸다. 정6품의 관원인 司謁이 전한 이같은 대답은 해산명령과도 같은 통고였다. 이리하여 1892년 10월부터 전개해 온 신원운동은 복합상소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함으로써 원점에 서게 되었다. 오히려 소두 박광호를 잡아 들이라는 왕의 명령으로 동학교도들은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별무성과에도 광화문 복소는 동학교인들의 역사적 자각을 불러 일으키게 했으며 향후 투쟁방향의 새로운 전환을 준비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京鄕에서는 斥倭洋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서울의 외국 공관과 교회당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掛書가 나붙었으며 지방 관아에도 외국인을 배척하는 榜文이 게시되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 기포드의 학당에 붙은 괘서를 시작으로 한 달 여동안 서울에서 잇따라 발생한 斥倭洋榜文 게시사건은 당시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광화문 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위해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외국인들을 더욱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서울주재 외국공관에서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본국과 연락을 취하고 자국민의 피난을 고려하는가 하면 조선정부에 대책을 촉구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대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던진 이같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이며 일련의 교조신원운동과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또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전면에 내세워진 ‘斥洋斥倭’의 주장과는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이같이 제기되는 여러 의문은 척왜양방문 게시사건을 주도한 주도세력 문제와 관련지어 최근 학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에서의 척왜양방문은 미국인 선교사 집에 붙은 두 건과 프랑스·일본 공사관에 나붙은 각 한 건의 榜文이 전부이다.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이들 괘서는 내용상 서양의 기독교 침투와 일본의 세력확장에 강한 증오심을 담고 있다.
3. 보은집회(정치집회로 발전)
보은집회라 함은 1893년(고종 30) 3~4월에 동학교단이 종교의 자유와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걸고 충청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를 말한다.
1893년 2월에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복권을 요구했던 서울 복합 상소(伏閤上疏) 운동이 실패하자, 정부는 동학을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는 1893년 3월에 충청도 보은에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전국에서 2만여 명의 교도가 모인 보은 집회에서 동학교단은 이전까지의 교조 신원 운동에서 더 나아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세우고, 탐관오리와 세도가를 비판하였다. 이에 정부는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던 충청 감사 조병식을 파직시키는 한편,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임명해서 보은으로 급파했다. 보은에 도착한 어윤중은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동학 지도부에 대한 회유와 설득을 진행했다. 그 결과 보은 집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4월 3일에 해산되었다.
동학교도들이 교조 신원이라는 종교적 목적에서 더 나아가 반외세의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낸 보은 집회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학지도부는 이 집회를 마지막으로, 신원운동이나 다른 청원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동학을 사교로 낙인찍은 정부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은집회 등 일련의 평화적인 시위성 신원운동은 동학과 현실 체제 사이의 갈등을 크게 증폭시켰다. 동시에 동학 자체의 현실대항적 능력을 한 단계 높임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의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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