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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1900년대 민족 계몽운동단체 두문자 : 보 황 헌 늑 자 보 퇴 신 협

by 안녹산2023 202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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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1900년대 민족 단체 : 보 황 헌 늑 자 보 퇴 신 협

 

보 : 안회(1904.7)

황 : 일본 무지 개간 반대(1904.7)

헌 : 정연구회(1905.5)

늑 : 을사약 반대(1905)

자 : 대한강회(1906.6)

보 : 국채상운동

퇴 : 고종강제위 반대

신 : 민회(1907.4)

협 : 대한회(1907.11)

 

 

1. 안회 일본 무지 개간 반대(1904.7)

보안회라 함은 190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회(會)의 명칭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한다. 1904년 2월 러 · 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하고, 이어서 각종 이권을 탈취하는 등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6월에 나가모리(長森藤吉郎)가 어공원 소관의 산림 · 천택(川澤)과 황무지 개간권을 이양 받고자 일본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에 유학(幼學)과 품관(品官)들은 반대 상소운동을 벌였고, 각 언론기관도 반대 사설을 실어 여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송수만 · 심상진 등이 1904년 7월 13일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중민회의(衆民會議)를 열어 보안회를 발기하였다.

 

회장에 신기선, 부회장에 정유인(鄭裕寅), 대판회장(代辦會長)에 송수만이 추대되었다. 그들은 전국에 통문(通文)을 돌리고 회의 취지와 운영 요강을 밝혔다. 여기에서 “국가의 존망이 달린 것이므로 조그마한 땅도 양여할 수 없다.”고 밝히고 아울러 “이러한 뜻이 관철되면 그 날로 해산할 터이나, 목표가 관철될 때까지 성토 · 연설 운동을 전개한다.”고도 밝혔다.

 

전국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서울에서는 종로 상가가 문을 닫았고 전차 운행을 중단하였다. 일본 침략에 대한 성토와 연설 및 반대 선언문 발표가 연일 계속되자, 일본은 치안에 문제가 있다고 대한제국 정부에 항의하고 해산시킬 것을 강요하였다. 정부는 7월 18일에 3차에 걸쳐 칙사를 파견해 해산을 종용했지만 보안회는 해산하지 않았다. 다만 교통에 방해된다 하므로 집회장소를 종로에서 전동(典洞) 한어학교(漢語學校)로 옮겨 18일부터 집회를 다시 열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공사는 무장 헌병과 경찰을 출동시켜 해산을 강요하고, 송수만 · 송인섭(宋寅燮) · 원세성 등을 납치하였다.

 

7월 21일, 일제는 한국의 치안을 담당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이튿날 한어학교의 보안회 집회장소로 돌입해 총기를 휘두르면서 모든 문서를 빼앗아갔다. 그 뒤에도 양자 간에 무력충돌은 계속되었다. 이에 정부가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거절한다고 발표하자, 보안회의 집회는 해산되었고 구속자들이 석방되었다. 그러나 보안회 자체는 해체되지 않은 채 황성용(黃性溶)을 회장에 새로이 추대하였다. 그러나 9월 11일 협동회(協同會)로 명칭이 바뀌면서 활동이 위축되었다.

 

보안회에서 벌인 황무지개척 반대운동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방불하게 하는 민중 구국운동이었다. 이로 인해 일제는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치될 때까지 황무지개척권에 관한 거론을 유보하게 되었다.

 

 

2. 정연구회(1905.5) 을사약 반대(1905)

헌정연구회라 함은 1905년 5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 운동단체를 말한다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의 영향을 받은 개신 유학자들인 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윤효정(尹孝定)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을 대상으로 근대적 의식을 깨우치고자 1905년 5월에 조직하였다. 

 

한편,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점차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거센 압력에 직면하여 국민의 정치의식과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조직한 것으로, 근대적 국가의 특성을 헌정(憲政)으로 보고 근대국가의 성격과 운영에 관한 정치교양을 쌓아 장차 쟁취할 근대적 독립국가의 헌정에 관한 연구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년도 못 된 1906년 윤효정·장지연(張志淵)·나수연(羅壽淵)·김상범(金尙範)·임병항(林炳恒) 등이 보다 주체적 목표를 가진 자주·자강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발전적으로 확장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개편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발발 3개월 만인 1904년 5월 이미 한국병합을 위한 기본정책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여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국침략을 승인받거나 혹은 묵인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뒤 1905년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한국은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민은 을사조약이 곧 국가의 멸망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한민족을 분격시켜 거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항쟁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선 것은 언론계였다.

특히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 皇城新聞》에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 是日也放聲大哭〉라는 논설을 발표,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에 조인한 매국대신들을 통렬히 비난함으로써 전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장지연은 경무청으로 잡혀갔으며,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국신문 帝國新聞》·《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등이 계속해서 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각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조약반대운동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전국민의 항쟁을 유도, 고무시켜갔다. 언론계의 활동과 더불어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에 의한 상소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조약이 강제체결되던 17일 밤에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거부방안을 상주하였다가 얼마 뒤 면직처분을 받았다.

 

의정부참정 이상설(李相卨)도 19일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어 박제빈(朴齊斌)·이유승(李裕承)·정명섭(丁明燮)·조세환(曺世煥)·고익상(高翊相)·김종호(金鍾護)·윤태영(尹泰榮) 등이 같은 취지의 상소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또한, 유생들은 서울에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두고 21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하였다.

 

한편, 가평에서 신병을 요양하고 있던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趙秉世)는 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즉각 상경하여, 26·27일 이틀 동안 이근명(李根命)·민영환(閔泳煥) 등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 매국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상소하였다.

 

12월에 들어서도 전찬정(前贊政) 최익현(崔益鉉)을 필두로 강원형(姜遠馨)·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이승희(李承熙) 등 조야로부터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이 계속되었다. 한편, 고종은 열강의 동정을 얻어 조약 파기를 선언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약 강제 체결 직후인 11월 22일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ulbert, H. B.)와 프랑스주재한국공사 민영찬(閔泳瓚) 등을 미국무장관 루트(Root, E.)에게 파견하여 한국정부의 처지를 전달하고 미국의 대한지원(對韓支援)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못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측에 통고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상소운동과 더불어 순국항쟁이 일어났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특히,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은 11월 30일 울분에 차 고종과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할복자결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일운동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병세도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한 뒤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두 원로대신에 뒤이어 전 참판 이명재(李命宰),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이설(李偰), 송병선(宋秉璿) 등도 잇따르며 자결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유생·관료들뿐만 아니라 일반민중들도 조약 강제체결 소식에 일제히 분기하였다. 서울 종로에 있던 육의전이 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의 결의로 철시를 단행하자, 시내의 모든 상가도 여기에 동조, 철시함으로써 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와 여기에 협조한 매국적신들을 규탄하였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행,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은 을사오적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상소·순국 등 소극적 저항과는 달리, 일제와의 직접 항전을 통해 주권을 되찾으려는 무력항쟁인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906년 2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은 함께 정산(定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같은 해 6월최익현이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일대를 진동시켰고, 영남에서는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신돌석(申乭石)도 평해·영덕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그 밖에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도 우동선(禹東鮮)·이진룡(李鎭龍)·박정빈(朴正彬) 등이 이끄는 의병진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펼쳤다.

결국, 항일투쟁을 전제로 한 을사조약반대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밖으로는 일제침략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항일운동이었고, 안으로는 부일매국노 규탄과 실력양성을 위한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

 

3. 대한강회(1906.6) 국채상운동 고종강제위 반대

대한자강회라 함은 1906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운동단체를 말한다. 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 이준(李儁)·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 20여 명이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殖産)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회칙에 의하면, 회원과 본회의 목적에 찬성하는 찬성원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20명 및 회의 사무를 집행하는 간사원 20명, 그 밖에 법률과 정치에 정통한 일본인 1명을 고문으로 둔다고 규정하였다.

 

1906년 4월 임시회에서 임원이 선출되었다. 회장에 윤치호(尹致昊), 고문에 오가키(大垣丈夫), 평의원과 간사원은 각각 10명씩 선임되었다. 부회장이 선출되지 않고 평의원과 간사원이 규정보다 적었던 것은 창립 초기여서 회원 확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계속적인 임원 개편이 있다가 결국 9월의 임원보선시에서 규칙에 규정한 임원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원의 임기는 6개월로 연임이 가능하였다. 회원은 임원 2명 이상의 보증과 추천을 받아 입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해 활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지회 설립의 방법은 지방 유지가 본회의 취지·목적에 동의하고 그 지방에서 동지 30명 이상을 확보해 입회 청원을 하면, 본회에서 평의원 이상 임원 중 2명 이내의 인원을 선정해 해당 지역의 사정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시찰원이 결과를 평의회에 보고한 뒤 그 지방에 대한 보증을 서야만 평의회에서 통과되고 월보와 회원증을 발송하였다. 그리고 전체 회원의 모임인 통상회(通常會)의 승인을 얻어야 비로소 지회로서 인정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절차가 복잡한데다가 활동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했던 관계로 지회 조직은 적은 편이었다. 1907년 5월의 보고에 의하면 전국에 25개소가 있었다. 때문에 활동은 주로 서울의 본회가 중심이 되었다. 회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본회에 교육부와 식산부를 두어 사무의 확장을 담당, 연구하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매월 1회씩 열리는 통상회마다 회원 이외에도 일반 대중이 참석할 수 있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또 이를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자강회월보』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회에서 긴급히 실시되어야 한다고 결정된 사항은 정부에 회원을 파견해 건의, 관철시키려 하였다. 정부에 건의한 사항은 교육활동 측면으로는 학부교과서 편집문제·의무교육 실시·사범학교 설립·각 사립학교 연락건 등이 있다. 이 밖에 사회교육의 일환인 조혼 금지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전국에서 유흥비 마련을 위해 가족 몰래 가산을 파는 행위가 만연했는데, 이를 바로잡고 개인의 재산 보호, 나아가 식산흥업을 위해서도 부동산 매매시 증명서를 첨부해야 한다는 법령 반포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식산흥업의 필요성, 국가부원 증진책(國家富源增進策), 식산 결여의 원인, 황무지 개척, 일제의 황무지 개척 요구의 저의, 한국의 기후, 한국의 생산물, 임업의 필요, 토지 개량의 필요성, 종자 개량 등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거친 후 월보를 통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때 적극적인 참여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운영에 필요한 재정은 회칙에 따라 회원의 입회금과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충당하였다. 회비는 가입시 입회금 1원을 내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의 운영은 주로 기부금과 찬조금에 의존하고 있어 재정 상태는 궁핍한 실정이었다. 이 회는 출발 당시부터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활동 범위를 설정했기 때문에 소극적이며 온건한 계몽운동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당시 정부도 통감부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대정부건의운동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특히,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일본인 고문 오가키를 두었지만, 그가 한국인을 위해 활동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이것은 그의 회고담에서 그가 일제 침략의 수족으로 활약했음을 밝히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 단체는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07년 8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의 지시에 따라 내부대신의 명의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대한자강회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당시의 사회적 제약 아래서도 월보의 간행, 지회의 설립 등으로 주권회복·자주독립의 쟁취를 위한 국민계몽에 이바지한 바 크다. 그리고 그 뒤에 조직되는 대한협회의 전신이라는 점에서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은 미국·영국 등 열강의 국제적인 밀약으로 진행되었으나, 국제정세에 어두운 고종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3명의 밀사를 헤이그 平和會議에 파견하였다. 밀사 일행은 1907년 6월 25일 현지에 도착하여 외교활동을 벌였으나, 대한제국에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참석이 거부되고,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각국 위원들로부터 면회조차 거절당한 채, 萬國記者協會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강제성을 폭로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의 장악을 목표로 세우고, 고종의 양위와 통감의 동의에 의한 행정, 그리고 대신·차관 등 주요 관직에 일본인 임명 등을 실현할 방안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훈령하였다. 이토는 한국의 총리대신을 불러, 고종의 밀사파견은 일본에 대한 적대행위이고 협정위반이므로, 일본은 한국에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고 위협하여 고종의 양위를 강박했으며, 한국의 총리대신과 내각대신들은 일본 정부의 책임추궁을 회피하기 위하여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다. 고종은 처음에는 양위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일제와 한국 내각대신들의 강요로 1907년 7월 18일에는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케 했다가, 7월 21일에는 황태자에게 帝位를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에 대하여 통감 이토로부터 책임추궁을 받은 이완용 내각이 고종의 양위를 간청한 7월 16일 경부터 대한자강회·동우회·대한구락부·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의 회원들은 서울 도처에서 연설로 민심을 고무하기 시작하였다. 7월 18일 헤이그 밀사사건의 처리를 위하여 일본 외무대신이 내한하자, 항간에 황제가 사죄차 渡日하리라는 설, 혹은 황제가 양위하리라는 설, 혹은 韓日新協約이 체결되리라는 설이 유포된 가운데,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회원들을 비롯한 서울시민 수천 명이 궐기하여 종로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한문 앞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7월 19일 황태자 대리청정의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에서 대중시위를 조직하여 내각대신들을 성토하고 決死會를 구성하여 일진회의 기관지인 國民新報社를 습격 파괴하였다. 한편 시위대의 일부 군인들은 탈영하여 종로파출소를 습격,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여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황태자 대리식이 거행된 7월 20일에도 대한자강회·동우회 회원들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慶運宮을 둘러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대한자강회·동우회의 젊은 결사대들 주도하에 성난 민중들은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을 방화 파괴하고,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 파괴하였다. 그러나 7월 21일에 일본경찰과 헌병은 서울시내 요소에 기관총을 가설하고 삼엄한 경비를 펴 시민들의 시위를 봉쇄했고, 이런 가운데 고종은 황태자에게 완전히 양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킨 뒤, 곧바로 新聞紙法(7. 24)과 保安法(7. 27)을 반포하여 한국인의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활동을 질식케 하고, 丁未七條約(7. 24)과 軍隊解散(8. 1)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행정권·사법권·군사권을 탈취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통감부는 이완용 내각의 宋秉畯으로 하여금, 대한자강회가 민중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보안법 제2조 “내부대신은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結社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하여, 1907년 8월 21일에 대한자강회를 강제로 해산케 하였다.

 

요컨대 일제의 강요에 의한 대한제국 황제의 퇴위라는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한자강회 중심의 정치운동은 월보와 연설 등 언론과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형태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대중시위 형태로 전환되었고, 이로써 대표적 애국계몽단체였던 대한자강회는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일제의 보호국 체제하에서 애국계몽단체들의 정치운동이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대중시위로 전환되었을 때, 그 단체의 존립 자체마저 불가능했던 것이다.

 

4. 신민회

신민회라 함은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를 말한다. 전국적인 규모로서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신민회의 창립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 애국집단 세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다.

셋째는 서북 지방과 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 세력이고,

넷째는 무관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 세력이다.

 

이 다섯 개 집단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즉,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몇 명과 미주 지역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 회원들이었다.

 

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그들은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에는 각자 관련 분야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 운동단체였다. 안창호·이강·임준기(林俊基) 등은 1906년 말∼1907년 초의 연휴 기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하였다.

 

그들은 이 결사의 목적에 비추어 미주에서 이 단체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본국에서 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본국에 파견할 대표로 안창호를 뽑았다. 안창호는 1907년 1월 20일경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동경을 거쳐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

 

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신민회는 <대한신민회 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서 다음과 같이 목적을 규정하였다.

 

첫째,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다. 신민회가 그들이 세우려고 한 자유 독립국의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이 아닌 공화국으로 규정한 것은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었다. 독립협회 때에는 입헌군주국이 협회의 공식 목표였다. 국가의 성격이 공화국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만민공동회의 몇몇 청년들 사이의 이상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신민회에 이르면 입헌군주국은 낡은 체제로 인식되고, 처음부터 국권이 회복되면 공화정을 세우려는 목표가 뚜렷하였다.

둘째,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무엇보다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 양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셋째,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민회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 국가는 국민의 것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의 실력 양성은 신민(新民)에 의한 민력 양성(民力養成)을 의미하였다.

넷째,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신민회 취지서>는 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이 옛날로부터 자신치 못하여 악수악과(惡樹惡果)를 오늘날 거두게 되었으나, 오늘 진실로 자신할진대 선수선과(善樹善果)를 타일에 거둘지라. 오늘 나라를 위하는 길은 역시 자신뿐이니라.”

다섯째, 자신은 사회·국가·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대한신민회 취지서>에서 민습의 완고에 대해서는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매에 대해서는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대해서는 ‘신제창’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또 원기의 소침에 대해서는 ‘신배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대해서는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대해서는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부진에 대해서는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대해서는 ‘신개혁’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여섯째,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① 신문·잡지와 서적을 펴내어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킬 것,

③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 각지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할 것,

⑤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 신민회 회원끼리 힘을 더해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⑦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⑧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일곱째, 실력을 배양하는 동안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서 신민회를 육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애국적인 동포를 하나로 단합시키며, 각 구역에 연락기관을 나누어 세워서 연락과 교통을 긴밀히 하려고 하였다.

여덟째, 실력이 배양되면 신민회가 앞장서고 ‘자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궐기,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 문명국을 수립하려 하였다. 위의 신민회 목적과 이념 체계에서, 하위 수준의 목적은 차례로 상위 수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 조직은 앞서 지적한 대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신민회를 공개 합법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만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요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고,

다섯째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앙에 회장·부회장·총감독·의사원(議事員)·재무원·집행원·감찰원을 두었다. 최고지도부로서 총감독은 사실상 신민회 전체를 총괄했으며, 의사원은 입법기관으로서 각 도별로 그 임원을 선정하였다. 재무원은 재무담당 총책임자였고, 집행원은 신입 회원의 자격 검사와 조직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감찰원은 회원의 기강을 감찰하는 직책이었다. 도에는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각 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다. 군에는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다.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했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다. 5명 단위의 ‘반’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 조직이었다.

 

신민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밀결사이면서도 중앙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의결 기관을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신민회의 조직은 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했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회원의 입회는 매우 엄격하게 심사해서 이루어졌다. 회원은 애국사상이 확고하고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결심이 굳건한 인사에 한해 엄선하였다. 신민회 입회 때는 예식이 있고, 회원의 책임에 대한 서약이 있었다. 서약의 내용은, 회원의 생명과 재산을 신민회의 명령에 의해 국권 회복에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회원은 약 800명 정도로서, 신민회가 일제 관헌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 밑에서 조직된 지하정당임을 고려하면 많은 회원수였다. 이 숫자는 당시의 저명한 애국계몽운동가들 대부분을 망라하는 숫자였다. 신민회 조직의 사회적 기반은 105인사건 때 재판받은 인사들의 직업별 분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흥 시민층과 신지식인층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05인사건 때 판결을 받은 122명의 신민회 회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상업이 31.97%, 광공업이 5.74%로서 시민층이 전체의 37.71%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식층은 교사가 22.95%, 학생이 15.57%로서 38.52%를 차지하고 있다. 즉, 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전체의 76.23%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농업이 5.74%, 종교인과 공무·자유업이 각각 4.92%, 노동자가 1.64%이며, 기타 불명이 6.55%이다. 이것은 주로 시민층과 시민층의 지지를 받는 신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조직되고 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신민회가 모든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그 성격은 시민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교육구국운동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력 양성의 방법으로서 가장 많은 힘을 쏟은 운동이 신교육구국운동이다. 교육구국운동은 신민회가 창립될 당시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이 열정적으로 불붙고, 1908년부터 전국적으로 신교육열이 팽창하여 민중들이 논밭을 팔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신식학교를 세운 것은 신민회의 교육구국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한다. 둘째 민중이 각지에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국권 회복에 적합하도록 지도한다. 셋째 신민회 자체가 우수한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셋째번의 학교 설립이다.

 

신민회가 민중이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만 하지 않고 스스로 학교를 세운 곳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중학교를 세웠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학교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이런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서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둘째, 학교의 ‘모범’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마다 중학교를 세울 수는 없으므로 중요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중학교를 다수 세웠다. 민중에게 ‘모형’을 제시해 줌으로써, 민중이 이 모형을 보고 동일한 종류의 중학교를 자발적으로 세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이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실시해 교사를 양성했다. 신민회는 그들이 설립한 중학교에서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교사의 길을 걷도록 많은 힘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켜서, 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①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신안학교(新安學校),

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③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普昌學校),

④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

⑤ 납청정(納淸亭)의 가명학교(嘉明學校),

⑥ 안주의 협성안흥학교(協成安興學校),

⑦ 선천의 신흥학교(新興學校),

⑧ 곽산의 흥양학교(興襄學校),

⑨ 영흥의 명륜학교(明倫學校),

⑩ 경성의 경성학교(鏡城學校),

⑪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⑫ 서울의 협성학교(協成學校)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했다. 대성학교는 국권회복운동 간부와 국민교육에 필요한 사부(師傅)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때문에 중학교로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추고 철저한 애국주의 신교육과 동시에 철저한 체육 교육과 사관 훈련을 시켰다.

 

한편 보창학교는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두고, 강화군 내에 21개의 소학교 분교를 두었다. 이 밖에도 개성·금천·장단·풍덕·안악·충주·함흥 등지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각 지역의 보창학교는 대성학교에 비해 시설은 뒤떨어졌으나, 같은 계열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해 나가면서 더욱 전투적인 애국주의 교육을 시킨 데 특징이 있다. 이 시기에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학교 설립과 교육구국운동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애국계몽운동 중의 신교육구국운동에 큰 기둥이 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2) 계몽강연·학회운동

신민회의 활동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사업의 하나가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이었다. 이 운동은 신민회의 취약점 중의 하나인 부족한 재정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고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신민회의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활용,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이 계몽 강연을 통해 고취한 것은

 

① 애국주의,

② 국권 회복,

③ 민권 사상,

④ 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계몽,

⑤ 구습 타파,

⑥ 교육구국운동과 학교 설립의 고취,

⑦ 자발적 의무 교육 실시,

⑧ 학회 활동의 고취,

⑨ 민지(民志)의 단합 고취,

⑩ 실력 양성 호소 등이었다.

 

(3) 잡지·서적 출판운동

신민회는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활용하였다. 양기탁과 함께 논설위원과 사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해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기탁이 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신민회의 총본부 기능까지 겸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잡지·출판운동으로서,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을 중심으로 하여 1908년 11월에 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였다. 종래 ≪소년≫지는 최남선의 개인 잡지로서 많이 알려졌으나, 일제 관헌의 조사 자료가 밝히는 것처럼 신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활동하였다. ≪소년≫지가 105인사건과 때를 같이해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민회가 1909년 9월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하자, ≪소년≫지는 청년학우회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신민회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소년≫지는 공공연히 신민회의 기관지임을 내세우지 못했지만,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합법 외곽단체였으므로 ≪소년≫지는 대내외에 청년학우회 기관지임을 내세웠다. ≪소년≫지는 몇 차례 발행이 정지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청년들의 국권회복 의식 계발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출판 사업은 외곽 단체로서 1910년에 조직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단체는 신민회 회원 중 민족문화와 근대 국사학의 창립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의 보존과 간행을 주장하는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선광문회의 조직은 ① 고문, ②주간, ③ 종사(從事)로 편성되었다. 고문에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을 추대해 도서의 선택 등 정책 결정을 담당하도록 하고, 주간은 최남선이 담당해 이 회의 사무를 총관하였다. 종사는 주간 밑에서 편집과 교감(校勘) 등 일체의 회무를 처리하였다. 조선광문회는 창립 후 한국의 귀중한 고전들을 출판하는 데 큰 성과를 내었다. 그 밖에 서점 겸 출판소로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안악에 면학서포(勉學書舖)를 설립하여 도서 공급을 맡도록 하였다.

 

(4) 민족산업진흥운동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 침략을 군사 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때문에 신교육과 한가지로 민족 산업을 진흥하는 것도 실력을 양성하는 길임을 특히 강조해 이 부문의 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민족 산업의 진흥을 위해 우선 신민회 회원들이 출자해서 ‘본보기’ 공장과 회사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를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 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 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실업체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운동은 민족 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했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5) 청년운동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를 국민으로 보았지만, 세대별로는 청년층이 그 핵심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청년운동을 독립시켜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해 1909년 8월 신민회의 합법적인 외곽 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평양연회·의주연회·안주연회 등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그 밖에 곽산·선천·용천·진남포 등지에서 지방 연회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으나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의기는 높았으나 민족산업진흥운동과 비슷하게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해, 청년단체를 너무 늦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6)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신민회는 국내의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그 이튿 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이 의병운동을 지지하였다. 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삼은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년부터 1908년 말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했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간 1909년 봄이었다.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립, 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이 사업이 채 실천에 들어가기도 전인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伊藤博文)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안중근과의 관련 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金羲善)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가, 이듬 해인 1910년 2월에야 석방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신민회가 이때 결정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과 독립전쟁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독립군기지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 일대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 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서 선정한다.

② 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구입, 이에 필요한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한다. 또한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한다.

③ 토지를 구입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 청년들을 계획적으로 단체 이주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한다.

④ 새로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 기타 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무엇보다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해 사관(士官)을 양성한다.

⑤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한다.

독립군 장교는 현대적 장교 훈련과 전략전술을 습득한 무관학교 출신 사관으로 편성하며, 병사들 역시 모두 무관학교에서 현대 군사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정병주의(精兵主義) 군사훈련을 채택한다. 이는 일본 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조치였다.

⑥ 강력한 독립군이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한다. 최적의 기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힘이 더욱 커지고 침략 야욕이 팽배하여 만주 지역이나 태평양 지역까지 집어삼키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 중으로 추정했다.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재빨리 잡아서 그 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독립군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내외 호응해서 일거에 봉기, 실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무관학교와 독립군 창건, 독립전쟁 전략 등은, 크게 볼 때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신민회의 응전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실제 경험에 의해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며,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았다. 신민회는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金志侃) 등을 출국시켰다.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 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가 1911년 1월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같은 해 9월에 소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 회원을 대량 체포하였다. 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중에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관학교는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불렀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흥(新興)이란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이다.

 

신민회 회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신흥무관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 무관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3개월의 속성과를 두어 찾아오는 모든 애국 청년들과 의병들에게 철저한 현대식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1917년에는 통화현(通化縣)의 소북대(小北岱)에 분교를 설치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

이 밖에 1913년에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신민회는 결국 세 개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민회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국내의 신민회가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어,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세 곳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 창건은 그 뒤 만주에서의 독립군 창건의 모체가 되었다. 신민회 회원들이 세운 무관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애국주의로 정신 무장을 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현대적 사관 교육을 받은 장교와 병사들이 체계적으로 양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적 독립군이 편성되었다. 의병들도 재훈련되어 현대적 독립군의 대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립군은 과거의 의병과는 달리 일본 정규군을 현대전에서 능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신민회가 창건한 독립군은 사병이 부족해 장교 중심의 소규모 부대로 꾸려나갔다. 그러나 3·1운동 후 국내에서 청소년들이 물밀듯이 찾아오자 이들을 훈련해 대규모 독립군단을 편성, 청산리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 도처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독립전쟁을 전개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일제는 1911년 1월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도 검거하였다. 또한, 1911년 9월에는 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을 날조,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 회원을 비롯해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신민회는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5. 대한회(1907.11)

대한협회라 함은 1907년 11월에 설립된 계몽 운동 단체를 말한다. 대한 협회는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등 대한 자강회 계열, 손병희(孫秉熙),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등 천도교 계열, 정운복(鄭雲復), 최석하(崔錫夏), 설태희(薛泰熙) 등 서북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헌정 연구회와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1907년 11월에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남궁억, 부회장에 오세창, 고문으로는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가 선출되었다.

 

대한 협회 설립의 취지와 목적은 “정치, 교육, 산업을 강구하여 사회 지식을 발달하게 하고 신진 덕성을 도야하며 전국 부력을 증진하게 하여 이로써 참다운 국민적 자격을 양성하는 것”에 있었다. 이와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강령으로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생명재산의 보호, 행정 제도의 개선, 관민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의 사상 고취 등을 제시하였다.

 

대한 협회의 중앙회는 회장, 부회장을 비롯해 평의원 30인, 찬의원 30인을 두었고, 교육부, 실업부, 법률부, 재무부, 지방부 등의 5개 부를 설치하였다. 이 외에도 간사원, 회계, 서기, 회보 발행소장, 편집 겸 발행인 등이 있었다. 지방 조직은 부(府)와 군(郡)에 지회와 분지회를 설치하여 1909년 3월에는 그 수가 60여 개에 이르렀다. 지방 지회들은 교육 계몽을 실현하기 위해 각 지역마다 많은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또 신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 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노동자, 농민에게도 교육 기회를 확대할 목적으로 야학교 설립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대한 협회는 기관지로 1908년 4월 25일 『대한 협회 회보』를 창간하였다. 이 회보는 1909년 3월 25일 통권 12호까지 발행되었고, 이후 1909년 6월 2일 일간지인 〈대한민보〉로 변경하여 발행되었다. 대한 협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적극적인 정치 활동이 불가능해지면서 교육 계몽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주목적으로 하는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다른 한편 보호국 체제를 인정하면서 친일 권력을 지향하는 회원들도 상당수 나타나게 되었다.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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