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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동학농민운동 2 두문자 : 고 무 백 토 장 전

by 안녹산2023 2023.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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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무장투쟁

 

 

동학농민운동 2 : 고 무 백 토 장 전

 

고 : 부민란

무 : 장봉기

백 : 산봉기

토 : 황현 전투

장 : 성 황룡촌 전투

전 : 주 함락

 

 

1. 부민란

고부민란이라 함은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를 말한다. 

 

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농민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 침학(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민보주2(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고,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으며,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 그밖에 백성들에게 불효 · 불목 · 음행 · 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이와 같이, 당시 고부군 일대에는 누적된 봉건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어 농민의 불만이 축적, 고조된 상황에서 전봉준의 지휘로 봉기하게 되었다.

 

1월 10일 새벽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뒤 악질적인 이서배(吏胥輩)들을 문초하였다. 또한,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白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으로 전환될 기세였다. 

 

이 때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실책은 농민군을 더욱 자극하였다. 전봉준은 사방에 격문을 띄웠으며, 3월 21일 백산에서 봉기한 이후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우발적인 것이나 촉발적인 것이 아니라, 1893년 3월의 보은집회 후, 호남동학농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봉건 · 반외세 운동이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의 동학 지방 접주들에 의해 뚜렷한 목표 아래 계획된 것이었다. 근래 발견된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해 준다.

 

 

2. 장봉기

무장 동학 무리의 포고문(茂長東學輩布告文)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사이의 인륜은 그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다. 임금이 어질고 신하가 강직하며, 어버이가 인자하고 자식이 효도를 한 이후에야 나라가 성립되고 한없는 복을 누릴 수 있는 법이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현명하고 어질며 바르고 강직한 신하가 전하를 보좌하여 밝게 한다면 요순(堯舜)의 덕화와 문경(文景)1)의 통치를 손꼽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라는 자들은 나라에 충성을 다할 생각하지 않고 다만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며,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아부하고 뜻만 맞추면서 충성을 간하는 말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하고, 정직한 자를 비도(匪徒)라고 한다. 안으로는 나랏일을 도울[輔國]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아,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변하였다. 집 안에 들어가서는 즐겁게 살아갈 생업이 없고, 밖에 나와서는 몸을 보호할 방법이 없다. 학정이 날마다 심하여 원성이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상하의 명분이 뒤집어지거나 무너져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사유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지금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정승 이하부터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 배를 불리고 자기 집안을 윤택하게 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관리를 선발하는 통로를 재물이 생기는 길로 생각하여 과거 시험을 보는 장소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터가 되었다. 나라의 많은 재화와 물건들이 나라 창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 호주머니만 채우고 있다. 또한 나라 빚은 쌓여만 가는데 아무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탕한 짓을 하는 것이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전국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모든 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수령들의 탐학이 참으로 그대로이니, 어찌 백성이 곤궁해지지 않겠는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바, 근본이 쇠약해지면 나라도 쇠약해진다. 나랏일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할(輔國安民) 방책은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 집을 지어 오직 혼자만 온전할 방법만을 찾고 오로지 녹봉과 지위를 도둑질하니, 이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우리는 초야에서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이에 전국은 한마음으로 수많은 백성과 의논하여 오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를 하였다. 오늘의 상황이 비록 놀랄 만한 일이겠지만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기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라.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무장동학배포고문」, 『취어』

 

 

3. 산봉기

무장 당산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읍을 점령하여 대강의 폐정을 개혁하고 대오를 강화한 다음, 3월 25일에는 백산으로 이동하여 진을 쳤다. 백산은 광활한 호남평야 가운데 조그마하지만 우뚝 솟은 전술적 요충지였다. 이곳에 올라서면 사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 등 지휘부는 농민군을 확대개편하고 이른바 대진군을 위한 전열체계를 갖추었다. 전봉준 등 지도부가 고부읍에서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을 때 무장기포의 창의문과 통문을 보고 백산으로 몰려든 농민군들의 행렬은 줄줄이 이어졌다. 부안·태인·금구·원평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달려온 농민들은 이제 8천여 명에 이르렀고 지도부는 연합농민군을 재편성했다. 비로소 한 군 단위의 국지성을 벗어나 지방단위별로 본격적인 농민군이 조직된 것이다.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이 통솔하는 농민군이 무장 당산에서 기포하여 고부로 전진할 때 그 숫자는 4천여 명이었다. 여기에 전라도 각지에서 봉기하여 모인 농민군 부대와 태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 3백여 명, 말목장터에서 대기중이던 고부 농민 1천여 명이 합류하여 농민군의 병력은 8천여 명에 달했다.

 

백산에서 농민군 지도부 구성은 무장에서 봉기할 때의 지도부체제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지만, 고부읍을 점령할 즈음 합류한 접주급 지도자들을 지도부에 흡수하여 조직을 확대, 직위를 배분함으로써 농민군의 지휘체계를 확대 강화해 본격적인 진군체제를 갖춘 것이다. 농민군 지도부는 백산에 ‘湖南倡義大將所’를 설치하고 대장기에 무장기포 때의 동도대장 이외에 ‘保國安民’이란 네 글자를 크게 써 넣었으며, 격문을 공포해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에 띄워 백성들의 궐기를 촉구했다.

 

 

4. 황현 전투

황토현 전투라 함은 1894년 4월 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1894년 3월 20일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전라북도 무장에서 포고문을 발표하며 본격화된 농민 항쟁은 4,000여 명의 농민군을 바탕으로 고부 관아를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3월 26일~29일에는 백산에서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 및 12개조 기율 등을 선포하고, 농민군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孫化中, 1861~1895)⋅김개남(金開男, 1853~1895)을 세웠다. 그 후 태인으로 이동해서, 4월 1일에는 태인 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미 각 고을의 아전들까지 농민군에 투신할 정도로 농민군의 세력은 커져 있었다.

 

전라 감사 김문현(金文鉉, 1858~?)은 농민군의 동향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또한 전주성의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전라감영군을 소집했다. 이들은 4월 3일 농민군을 막기 위해 금구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향하다 태인 방면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4월 3일 밤을 태인에서 지낸 다음 일부 견제 병력만을 남기고 부안으로 이동했고, 4월 4일에는 부안 관아를 점령한 후 비치되어 있던 무기를 이용해 전열을 갖추었다. 4월 6일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부안을 떠나 고부로 향했고, 태인에 남아 있던 농민군들도 고부로 향했다. 이들은 도교산(道橋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도교산의 서쪽에 있는 지형이 당시 태인과 고부를 잇는 요지, 황토현이었다.

 

전라감영군은 전봉준이 이끌던 4천 명 규모의 농민군 주력 부대를 쫓아 고부 쪽으로 이동하였다. 4월 6일 오후 4시경 양군은 처음 조우했다. 농민군은 패배한 척하며 황토현에서 후퇴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날이 저물 무렵 감영군이 이를 추격하여 황토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 진을 치고 다음 날 오전까지 보내기로 하였다. 4월 7일 새벽 4시경에 농민군은 무방비 상태의 관군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감영군은 1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군의 지휘부 다수가 죽거나 도망쳤다. 황토현 전투에서 얻은 대승을 기반으로 농민군은 이후 전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장성 황룡촌 전투 : 농민군 최대 무기 장태

 

 

5. 성 황룡촌 전투

영광·함평·무안을 거쳐 장성에 이르는 동안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면서 달려온 농민군은 마침내 뒤쫓아 내려온 홍계훈의 경군과 장성에서 만나 접전을 벌였다. 이른바 장성 황룡촌 전투였다.

 

농민군이 장성 월평촌에 진을 친 이틀 후인 4월 23일 뒤따라 장성에 도착한 홍계훈은 대관 李學承·원세록·오건영에게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선봉 이학승은 황룡강가에 집결하여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농민군을 선공함으로써 전투의 포문을 열였다. 엉겁결에 공격을 받아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곧바로 삼봉에 올라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리하여 농민군과 경군의 대접전이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전주감영군과 전투를 해 본 적은 있으나 조선 최정예부대와 싸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경군은 외국에서 수입해 온 쿠르프식 야포, 회전식 기관총, 모제르식 소총 등의 최신장비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각 고을을 점령하면서 지방군의 무기들을 접수하여 처음보다 무장이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경군의 무기에 비하면 성능이 훨씬 떨어지는 재래식 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성 황룡강의 지형 지세를 환하게 익혀 둔 농민군들은 삼봉의 정상에서 학 모양의 진을 치고 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를 쏘아대는 관군 앞으로 장태가 수없이 굴러 내려갔다. 불을 뿜은 장태는 관군의 화력을 소모시켰고 이에 당황한 관군이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고 농민군은 장태 뒤에서 맹공격을 퍼부었다.

 

장성 전투에서 농민군의 무기로 특기할 만한 장태는 원래 닭을 키우는데 쓰이는 닭구장태 만드는 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농민군은 이 장태 안에다 짚을 넣어서 불을 붙인 뒤 수백 개를 경군 쪽으로 굴려 화력을 모두 소모시키고 그 뒤에 농민군들이 따라 붙어 경군에 접근하며서 공격했다.≪오하기문≫에서는 장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홀연히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럼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다. 밖으로 창과 칼이 삐죽하게 꼽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 돌을 쏘았지만 모두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다. 적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다. 초토군의 진영은 멀리서 빤히 바라보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도록 방임하였다.

 

이미 죽음을 무릅쓴 농민군의 위세와 용기는 관군이 확보한 신식무기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경군은 영광쪽으로 길을 따라 퇴각하면서 신촌리 뒷산 까치골 능선에서 농민군과 마지막 접전을 벌였다. 이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경군 대관 이학승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관 이학승과 다수의 경군을 죽이고 대포 1문, 쿠르프식 기관포와 회전식 기관포 각 1문, 그리고 양총 다수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반면, 경군은 대관의 전사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영광쪽으로 도망쳤다. 평소 경군들에게 오합지졸의 무리로 인식되어 왔던 농민군은 이제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용맹성을 직접 체험하면서 경군의 사기는 더욱 저하되었다. 이후 경군과 접전이 있을 때마다 농민군의 용맹성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고 동학농민군은 信符를 지니고 있어 총탄을 맞지 않고, 또 맞아도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그들의 용감성은 전설화되기도 하였다.

 

장성 황룡촌 전투는 농민군과 정식훈련을 받은 정규군인 경군이 최초로 접전을 벌인 곳이었으며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함으로써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첫째는 왕이 파견한 경군을 이겨 내었다는 사실이 농민군의 의식에 커다란 진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처음 동학과 난민들이 어울릴 때는… 감히 드러내놓고 관군과 대적하지는 못하였으며,” 또 얼마 전 함평에서만 해도 농민군은 초토사 홍계훈 부대를 두고 “이 군대는 우리 主上의 명을 받고 내려온 사람들이므로 貪官들의 兵隊와 달라 결코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싸움을 벌이면 우리들은 역적의 죄를 모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아직 왕에 대해 직접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유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장성 전투를 통하여 이러한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장성전투 승리 이후 농민군은 “王師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멀리 달려서 전주에 이르렀다.” 둘째로 장성전투 직전에 전라도의 농민군이 합류하여 대농민군부대를 이룸으로써 거괴와 정예가 다 모인 강력한 농민군 부대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물리력을 배경으로 연래의 목적이었던 전주점령이 성사될 수 있었다.

 

황룡촌에서 경군 대관 이학승을 뉘이고 대승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기수를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돌렸다. 갈재를 넘어 정읍·태인·금구·원평을 내달았다. 농민군에게는 오로지 ‘이 나라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보국안민의 의지와 확신이 있을 뿐이었다.

 

 

6. 주 함락

갑오년 4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삼천에서 하루밤을 묵은 1만여 명의 농민군은 전봉준 대장의 지휘 아래 아침 일찍부터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용머리 고개를 중심으로 진을 편 농민군은 성내외의 동정을 살피다 마침내 정오 무렵부터 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27일은 마침 서문 밖에 장이 서는 날이었다.≪동학사≫는 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장면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동학군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이미 수천명이 시장 속에 들어와 있었다. 때가 오시쯤에 이르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장판을 뒤덮자 장꾼들이 정신을 잃고 뒤죽박죽되어 서문과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이들과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함성을 내지르고 총질을 했다. 서문에서 파수보던 병정들은 도망질하기에 바빴다. 순식간에 성안에도 동학군 소리요, 성밖에도 또한 동학군의 소리다. 전대장은 유유히 대군을 거느리고 서문으로 들어와 선화당에 자리하니…

 

이른바 무혈입성이었다. 사실상 전주성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4월 18일자로 이미 파면되었고 ‘督判交涉通商事務’으로 있던 金鶴鎭이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나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다. 감영의 군사들은 초토사 홍계훈 군에 배속되어 있었기에 전주성은 이미 무장해제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농민군은 동문을 제외한 서·남·북문에서 공격했으며 장성전투에서 노획환 대환포로 서문을 깨뜨렸다. 곧 성문이 열렸고 전봉준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을 접수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체통도 잊은 채 가마를 버리고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변복한 뒤 동문을 빠져나가 공주까지 도주했다. 달아난 것은 김문현 뿐이 아니었다. 중영장 임태두, 판관 閔泳昇 등도 자신의 목숨 하나를 도모하는 데 바빴다.

 

경황중에도 조경묘 참봉 장효원은 慶基殿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御影을 둘둘 말아 허리에 꽂고 조경묘에 있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李翰의 위패를 끌어안고 위봉산성을 행해 내달렸다. 홀로 달아나던 판관 민영승이 장참봉을 발견하고는 어영을 재빨리 넘겨받아 위봉사 대웅전에 모셨다. 성을 버렸다는 죄를 훗날 면제받고자 하는 영악함이었다.

 

선화당에 자리한 전봉준은 농민군의 대오를 정비하고 4문을 굳게 방비하는 한편 기강을 세우며 농민군의 무질서를 바로잡아 나갔다. 이들은 성 안에서 검가와 검무를 즐겼으며, 옷감을 거두어 오랫동안 갈아 입지 못한 겨울옷을 벗고 여름옷을 새로 지어 입기도 했다.

 

한편 전봉준의 계략에 말려 5백여리를 뒤쫓아 다닌 홍계훈의 경병들은 전주성이 함락된 27일에야 뒤늦게 금구에 도착했다. 홍계훈은 장성 전투에서 선봉 이학성이 패배하고 농민군은 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곧바로 출발하지 않고 영광에 머물러 있다가 25일에야 영광을 출발하여 고창, 정읍을 거쳐 금구에 도착했던 것이다. 홍계훈은 금구에서 ‘전주성이 비도의 손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주성이 점령된 이유를 “감영부의 관속배 중 내응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기간에 걸쳐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자 최후의 승리이기도 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의 심장부였으며 호남일대의 으뜸가는 부였다. 따라서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중앙정부에까지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전주감영의 점령은 곧 전라도의 장악을 의미했고 나아가 조정에 대한 실질적 도전을 뜻했다.

 

전주성 점령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4월 29일 긴급 대신회의가 고종의 주재하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淸兵借兵案을 제기하였다. 김병시 등의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여러 대신들은 ‘事勢가 부득이 하다’고 하여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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