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갑오개혁 : 개 8 과 일 은 분 도 금 신 인 조 과 연
개 : 개국기년 독자적 연호 사용
팔 : 팔아문(농상아문 + 학부아문)
과 : 과거제 폐지
일 : 재정의 일원화(탁지아문)
은 : 은본위제
분 : 궁내부 의정부 분리
도 : 도량형 통일
금 : 조세금납제
신 : 신분제 폐지
인 : 인신매매금지
조 : 조혼 금지
과 : 과부재혼허용
연 : 연좌제 폐지
1. 개국기년
개국기년이라 함은 조선 말기 갑오개혁 때 채택한 기년법(紀年法, 특정 연도를 기원으로 하여 햇수를 세는 방법)을 말한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채택년인 1894년을 503년으로 산정하였다. 1894년 조선정부가 동학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청나라에 요청한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자 이를 빙자, 출병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뒤 명성황후를 대신하여 흥선대원군을 집권시켰고, 한편으로는 흥선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홍집(金弘集)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신설, 여기서 각종의 제도개혁이 단행되었다.
군국기무처는 6월 28일 신분·제도·관습의 개혁과 아울러 모든 국내외의 공문서에 개국기년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로써 당시 사용되던 청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인 광서(光緖)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392년을 원년으로 채택한 ‘건국기년’은 이듬해 11월 단발령과 함께 ‘건양(建陽)’ 연호와 양력채용이 공포, 양력 1896년 1월 1일을 기하여 폐지되었다.
개국기년의 사용은 전통적 사대종주국인 청나라와의 관계청산을 뜻하나, 상대적으로 일본의 한반도내에서의 우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2. 팔아문
의정부의 6조를 8아문으로 고치면서 의정부의 3정승제를 폐하고, 총리대신 1명만 두는 체제로 변경하였다. 8아문은
국가 일반 행정과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내무 아문,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 아문,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 아문,
사법을 담당하는 법무 아문,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 아문,
토목 공사를 담당하는 공무 아문,
군사를 담당하는 군무 아문,
농업 상업과 같은 산업 전반을 담당하는 농상 아문으로 구성되었다.
3. 과거제 폐지
과거 제도는 중국 수(隋)나라 때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때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조선도 건국 직후부터 과거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조선의 과거 제도는 고려 때와는 다소 다르게 운영되었다. 고려의 과거는 크게 문관을 선발하는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와 기술관 등용 시험인 잡과(雜科)로 구분되었다. 반면 조선은 제술과와 명경과 양자를 통합하여 문과(文科)라 하였으며, 무인 관료를 선발하는 무과(武科)를 신설하였고, 스님들이 보던 승과(僧科)는 폐지하였다. 잡과에는 고려 때부터 이어받은 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 외에 역과(譯科)⋅이과(吏科)를 신설하였다.
또한 대과(大科)라고 불리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는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를 운영하였는데, 이 두 시험을 소과(小科) 또는 생원⋅진사를 뽑는 시험이라고 하여 생진시(生進試)라고 칭하였다. 이 중 진사시는 고려 시대의 제술과와 마찬가지로 시(詩)⋅부(賦)⋅책(策) 등의 글짓기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며, 생원시는 고려 시대의 명경과와 마찬가지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 소과 합격자인 생원, 진사에게 성균관(成均館)의 입학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소과는 관학(官學)으로서 성균관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시험관 제도 역시 변화가 있어, 고려 시대에 시험을 주관하던 지공거(知貢擧) 제도는 다수의 시관(試官) 제도로 개편되었다. 고려 시대 고시관인 지공거, 동지공거와 그 급제자는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 문벌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다수의 고시관을 두고 각 고시관의 역할을 제한하였다.
과거 시험은 3년에 1번씩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간지가 자(子), 묘(卯), 오(午), 유(酉)인 해에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년시 외에도 부정기적인 과거 시험인 별시(別試)가 있었으며, 16세기 이후 별시가 점차 증가하였다. 문과의 경우 식년시 합격 정원은 33명이었고, 무과는 28명이었으며, 진사와 생원은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번의 시험을 거쳐 각각 100명씩 선발하였다. 과거 응시 자격은 원칙적으로는 양인 이상의 신분이면 가능하였으나, 일반 양인이 시험에 응시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또 일부 기술 시험의 경우 천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다.
이처럼 과거 제도는 능력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점차 시험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하는 등 폐단이 만연해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유형원과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개혁론이 제기되다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근대적인 관리 등용법이 제정되면서 과거 제도는 폐지되었다.
4. 재정의 일원화(탁지아문)
탁지아문이라 함은 조선 말기 국가 재무를 총괄하였던 중앙행정관청을 말한다. 1894년(고종 31)에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6월 28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에 따라 궁내부(宮內府)와 의정부(議政府)로 나누고 의정부 아래 내무·외무·탁지·법무·학무·공무·군무·농상 등 8아문을 설치, 7월 20일부터는 아문관제(衙門官制)에 따라 직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탁지아문은 구제도 아래서의 호조(戶曹)·친군영(親軍營)·선혜청(宣惠廳)·광흥창(廣興倉)·군자감(軍資監)·전운서(轉運署)의 업무를 포함, 전국의 예산·결산·조세출납·국채·화폐 등의 업무를 총할하고 각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는 부서로 설치되었는데, 1895년 4월 1일 별도의 「탁지부관」를 칙령 54호로 공포하고 탁지부(度支部)로 개칭하였다.
직제를 보면 대신(大臣) 1인, 협판(協辦) 1인을 두고, 그 아래 총무국·주세국(主稅局)·주계국(主計局)·출납국·국채국(國債局)·저치국(儲置局)·기록국·전환국(典圜局)·은행국·회계국 등 10개국을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각 국마다 국장인 참의(參議) 1인과 주사(主事) 2∼8인씩 총 45인을 배치하였는데, 은행국은 전환국장이 겸임하였다.
5. 은본위제
한국은 역사상 결코 상업이 융성하거나 화폐 경제가 발달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은분리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본위제도라는 개념 자체가 늦게 도입된다. 1894년의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조정은 최초로 은본위제를 도입하였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광무개혁 시 금본위제를 도입하였으나 재정상 문제가 많았다.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점유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 1904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일방적으로 은본위제도를 완전 폐지하고 금본위제도를 재도입하게 된다. 일본은 이미 1897년부터 금본위제도를 채택했다.
6. 궁내부 의정부 분리
궁내부는 갑오개혁 때 왕실 업무에 관한 관서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개화파와 일본은 왕조시대에 국가와 일체로 생각하였던 왕실을 국정 업무와 분리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하고 왕실이 정무에 관여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한제국기에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궁내부가 오히려 국정 운영의 핵심기구로 부상하였고, 각종 근대화 사업 기구도 궁내부 산하에 설치되었다. 1905년 이후 일본은 국권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황제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다시 궁내부를 대폭 축소하였다.
갑오개혁 때 왕실 업무에 관한 관서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개화파와 일본은 왕조시대에 국가와 일체로 생각하였던 왕실을 국정 업무와 분리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하고 왕실이 정무에 관여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정부 조직을 근대적으로 개편할 때, 국정 운영에 관한 관서는 의정부 소속으로, 왕실 업무에 관한 관서는 궁내부 소속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고종 31) 7월 22일에 제정된 궁내부 관제를 보면, 궁내부 관할 아래에는 승정원 후신으로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선원을 비롯하여, 경연청, 규장각, 통례원, 장악원, 내수사, 내의원, 사옹원, 상의원, 태복시, 명부사, 시강원, 내시사, 전각사, 회계사가 소속되었다.
1895년 3월에 내각제가 도입되면서 4월 2일, 궁내부 대신관방 아래에 시종원, 장례원, 규장원, 회계원, 내장원, 제용원 등 6원 체제로 축소되었다가,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이 퇴조하면서 11월 10일, 다시 관제를 개정하면서 원래 모습으로 복귀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궁내부가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운영의 핵심기구로 부상하였고, 각종 근대화 사업과 관련된 관서들이 궁내부 관할 아래에 설치되었다. 즉 비서원, 시종원, 홍문관, 장례원, 종정원, 돈녕원, 회계원, 태의원, 전선사, 봉상사, 상의사, 내장원, 주전사, 영선사, 태복사, 물품사 등 원래 황실 업무와 관련된 관서 외에 통신사, 철도원, 서북철도국, 광학국, 수륜원, 평식원, 수민원, 박문원, 예식원 등 근대적인 사업과 관련된 관서들이 궁내부에 설치되었다.
갑오개혁기에 왕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설치한 궁내부가 대한제국기에는 오히려 강화된 황제권을 실현하는 기구로 변모한 것이다. 하지만 1905년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국권침탈 과정에서 황제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다시 궁내부를 대폭 축소시켰다.
7. 도량형 통일
도량형은 길이·부피·무게 및 이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자·되·저울 등의 도구인데, 인간이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제도적으로 통일된 기준이 없었다면 공동생활과 국가체제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도량형이 활발하게 제작되어 사용된 것을 문헌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도량형의 틀은 변하지 않았지만 길이·부피·무게를 측정하는 단위의 증가와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중국의 기준과 혼용되었다. 오늘날 세계 도량형의 통일된 단위인 미터법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8. 조세금납화
우리나라 세제의 근대적 전개는 1894년의 갑오개혁에서 시작되었다. 종래 여러 가지 명목으로 논 · 밭에 부과되었던 각종 조세를 통합하여 지세로 일괄하고 금납화(金納化)하였다. 즉, 종래의 토지 1결에 대하여 부과하였던 각종 현물세를 당시의 곡가로 환산한 금액을 표준으로 하여 각 도에 지세를 등급별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세율의 산출기초는 종래의 각종 현물세를 그대로 시가로 환산하였다고 하나 실제로는 종래 징수하지 않는 수가 많았던 화전이나 초평(草坪)에까지 고율의 지세를 부과한 데 기인한다.
1894년의 세제개혁으로 세수는 증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재정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완화되지 않았다. 그것은 1896년도 예산이 150만7421원의 세입 부족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적자의 보전책으로 조선정부는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을 증대시키는 한편, 1900년에는 지세를 일률적으로 3분의 2나 인상하여 1결에 최고 50냥까지 부과하였으며, 1902년에는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여 최고 80냥까지 징수하는 등 농민에 대한 수탈을 계속 강화하였다.
호포세도 1894년의 갑오개혁 때 일률적으로 금납화하여 세율은 호당 상급 45전에서 하급 17전6리로 정하여 봄 · 가을 2기로 분납하게 하였다. 조선 전기의 공장세(工匠稅)는 개항 훨씬 이전에 폐지되었으나 장세(匠稅)는 갑오개혁 때까지 존재하였다. 주철장 · 유철장(鍮鐵匠) · 수철장(水鐵匠) · 옹점장(甕店匠)에 무명 1필씩 과세한 것이 그것이었다.
공장세 · 행상세가 폐지된 뒤 경성에서는 시전(市廛) 규모의 대소에 따라 이들에게 국역(國役)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장날(5일장)마다 거래상품에 대하여 약간의 과세가 있어 이를 그 지방비에 충당하였다. 이를 장시세(場市稅)라 칭하였다. 또, 포(浦)에 있는 여각에도 장세처럼 과세하였으며 경상의 각 관청에서도 과세한 곳이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들은 갑오개혁 때 모두 폐지되었다. 무세(巫稅)도 갑오개혁 때까지는 존속하였다. 인삼세(人蔘稅)의 경우 개항 직전부터 증조(蒸造) 근수가 해마다 증가하였으며, 황실에서 관리하다 갑오개혁 때에는 이를 탁지부에 이관하였다.
9. 신분제 폐지
개항이후 일제에 의해 식민지 지배체제로 편입되는 1910년까지는 비록 짧은 시기지만 신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 왔다. 조선후기부터 급속한 사회변화속에서 신분제는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신분간의 뒤섞임 현상, 즉 양반신분의 양적 팽창속에서 몰락양반이 속출하고 이들이 밑으로 떨어져 내려오는가 하면, 경제력을 확보한 평민들이 신분을 돈으로 사고 올라오는 현상이 나타났다. 구향과 신향의 대립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국가는 이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있었다. 1801년의 노비해방은 그 단적인 보기였다. 공노비가 해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常民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상민화해서 살고 있는 공노비들, 더 이상 身役을 거두기도 어렵게 된 이미 국가의 손을 떠난, 그러나 적어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노비인 이들을 차라리 풀어줌으로써 국가의 조세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신분제 붕괴 현상은 개항 전후한 시기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개항은 평민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유리한 사회·정치환경이 점차 조성되는 계기였다. 외세가 급속히 밀려들어오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쉴새없이 터지는 상황에서 보수 지배층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당연히 정치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민중들은 계속 민란을 일으키면서 그 속에서 점차 자신들의 사회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전통적인 신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입법기관인 軍國機務處에 의해 폐지되었다. 이것은 길게 보면 조선후기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온 거대한 신분제 폐지 운동의 흐름의 결과였으며, 직접적으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분출된 민중의 강렬한 요구에 밀려 이루어진 것이었다. 1894년에 신분제도를 법적으로 폐지하기는 했지만 이는 이미 무너져 가던 신분제도를 법적으로 확인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신분제도의 법적 폐지 선언이 불가피하게 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전통적 신분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만큼 사회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실상 국가의 징세와 戶役 및 군역을 통해 각 개인의 노동력을 직접 수탈하는 지배방식이 무너지고, 실질적으로 노비해방이 이루어지고 있던 속에서 신분제도의 폐지는 이러한 현실을 법적으로 뒤늦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개화파 정권의 신분제 폐지 정책은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일본측이 제시한 개혁안도 상당 부분 반영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갖고 있던 평소의 개혁 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정책 내용속에서 어떤 부분이 특히 농민군의 요구를, 또 어떤 부분이 자신들의 개혁 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인지를 구분하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농민군의 폐정 개혁 요구 가운데 신분과 관련된 것은 반상 차별의 문제와 노비제, 천민해방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화파 정권의 신분 개혁 정책에는 이러한 농민군의 요구가 대부분 반영되었다. 특히 노비제를 폐지하고 천민을 해방하는 조치가 내려진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개화파 정권이 의도했던 개혁의 무게 중심은 그 보다는 오히려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양반신분의 각종 특권을 폐지하는 쪽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초기에 발표되었던 의안 내용 가운데 노비제 폐지와 천민해방에 관해서는 원칙을 강조한 2개의 의안만 발표되었을 뿐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운 반면 나머지 의안들은 양반신분 유지의 결정적인 통로였던 과거제를 폐지하고 문벌 중심의 관료 등용과 문무 차별을 깨는 데 초점을 맞추고 아주 상세하게 내용을 규정하고 있어 크게 대조를 이룬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사회 관습 개혁 내용은 대부분 유교 윤리를 신봉하는 양반을 중심으로 짜여졌던 서얼 차별·조혼·연좌제·과부 재가 금지 등 가족제도와 관련된 관습은 물론 복식·두발·가마 사용 등의 신분간 차별속에서 양반 지배층의 특권이자 외적 상징으로 작용하던 것들을 폐지 내지 개혁함으로써 양반신분과 일반 평민신분사이의 현실적인 장벽을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개혁 내용은 주로 양반 지배층 내부의 관습을 제거하려는 것이었고, 노비 천민층의 해방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반상의 차별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였던 천민집단에 대한 차별 관행에 대해서는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박영효정권 때 양반과 官의 일반민에 대한 차별 관습에 관한 여러 가지 시정지시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양반중심의 사회 관습 개혁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약한 것이었다.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인물들은 개항이후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으며, 지주제의 기본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부세제도의 개혁과 통상무역을 통한 상공업 진흥, 그리고 근대적 관료제도의 도입 등의 개혁 방안을 구상·실현하고 있었다. 신분제 폐지 정책은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된 갑오개혁의 일환이었다. 개화파는 지배층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한편 지주전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압력이 밑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형태든 민중의 요구를 수용, 정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해가던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적절한 수습책을 제시하는 것이 당장 중요했다.
그렇지만 이들 개화파 정권 참여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지주계급이자 동시에 양반신분 보유자들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보유한 특권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주제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으며, 개항이후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지주제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보호하고 키워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근대 상공업을 발전시켜 나갈 때도 지주계급이 스스로 농업을 근대화하면서 동시에 상공업의 발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때문에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이 볼 때 경제적인 차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조세제도와 국가의 재정구조였지, 지주제가 아니었다.
개화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이었고, 지주제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여기에 근대적인 상공업의 육성을 통한 부국강병이야말로 근대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개혁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이념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했으며, 이들에게는 종래의 유교 이념과 양반신분을 내세우는 것, 즉 신분제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커다란 의미가 없었다. 사실 신분제 유지를 통해서 지배 세력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는 지주제와 신분제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때문이었다. 양반신분 보유자의 일부만이 지주로, 나머지 대부분은 자영농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양반신분을 보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외적 강제를 강화해 중세국가의 전통적 지배 전략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개혁 방향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분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비해 치루어야 할 사회적 비용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신분제를 폐지하는 것은 당연한 정책적 귀결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노비해방에 그리 적극적일 수는 없었지만, 신분제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를 폐지할 의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의 첫 단추를 채우는 초기부터 신분제를 개혁하는 각종 의안을 발표한 것은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수습책이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구상하던 근대화 방안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노비제 폐지 조치와 천민해방에 관한 선언은 2개 의안에 기본원칙만 담았을 뿐 상세한 규정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어 양반 지배층 내부에서 터져 나온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노비제의 잔존을 인정하고 개혁안이 신분제를 전면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상당한 정도로 개혁 내용을 후퇴시키기도 했다. 그 뒤에도 백정·승려·기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조치를 취했을 뿐, 이들을 완전한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분명한 조치는 취한 적이 없다. 이것은 개화파가 농민군의 요구에 따라 일종의 수습책으로 천민해방을 실시한 것일 뿐, 천민해방에 관한 구체적인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천민해방을 규정한 의안은 흔히 칠반천인(七般賤人)을 모두 해방한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매우 간단하여 천민 가운데 일부인 驛人·倡優·皮工 등에 관해서만 언급할 뿐 백정을 비롯하여 승려·기생 등 다른 천민집단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농민군이 폐정개혁 요구에서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특히 백정의 해방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백정해방에 대한 언급은 결코 무시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백정에 대한 조치는 언급되지 않았으며, 나중에 후속 조치로 나타났다. 그리고 “屠戶를 천민에서 면하게 하고 호적을 만들도록 허락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나중에 면천 조치가 내려진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그들에게 허락된 호적은 일반 호적이 아닌 그들만의 특수 호적이었다. 光武戶籍에서 노비였던 자들과 역인·창우·피공 등은 모두 일반 호적에 차별없이 함께 섞여 들어간 데 비해, 백정과 승려는 따로 특수 호적을 작성하고 있었던 사실이 한꺼번에 차별 조치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개화파 정권이 추진한 신분제 폐지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중세의 기본틀을 개혁하는 것이었지만, 총론에서만 그러할 뿐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불철저한 점을 갖고 있었고, 세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반발에 부딪칠 때는 그나마 자신들의 개혁안을 부분적으로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갑오개혁이 전적으로 일본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안 내용이 일본에 의해 강요되고 있다는 인식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유생들의 입장에서는 외세의 위협과 자신들의 기반을 없애려 드는 데 대한 위기의식이 한꺼번에 겹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이 볼 때도 이들의 개혁안은 일본을 등에 업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적 위기의식이 이 개혁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10. 인신매매금지
11. 조혼 금지
혼인 연령에 대한 규정은 조선 세종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의 혼인 연령을 참고하여 여성의 혼인 연령을 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세종실록』의 1427년(세종 9) 9월 17일조에 의하면, 예조에서 ‘혼인의 연한을 정하지 않은 까닭에 세간에서 혼인을 서둘지 않아 시기를 잃게까지 된다. 이는 다만 음양(陰陽)의 화합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혹은 남에게 몸을 더럽히게까지 되어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여성들은 나이 14세에서 20세 안에 혼인하도록 하고, 이유 없이 이 기한 내에 혼인하지 않으면 혼주(婚主)를 처벌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한편 1440년(세종 22) 3월 8일조 『세종실록』에는 조혼에 대한 규정이 보인다. 즉 남자는 16세, 여자는 14세 이후에야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예외적으로 나이 50이 넘은 부모가 원한다면, 자녀 나이가 12세 이상일 때 관의 허락을 받아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혼을 규제한 이유는 당시 풍속이 부귀를 사모하여 혼인을 너무 일찍 의논하는데, 너무 어린 나이에 혼인하면 부모 되는 도리를 알지 못한채 자식을 두는 고로,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고 백성이 많이 요사(夭死)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후대의 조혼 폐해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혼 추세는 계속되어 남자 14세, 여자 13세 이상이면 혼인할 수 있도록 했고, 부모가 50세 이상이거나 병이 들어 자녀가 일찍 혼인하기를 바라는 경우에는 자녀 나이 10세 이상이면 관에 고하여 혼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자꾸 혼인연령이 낮아졌던 이유는 가능한한 빨리 후손을 얻어 가계 계승을 안정시키려는 가족제도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남자 15세, 여자 14세 이후에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그리고 부모 중 한사람이 병이 있거나 나이 50이상일 경우는 자녀가 12세 이상이면 관에 고하여 혼인할 수 있도록 했다.
조혼이 폐습이라는 인식은 1886년 『한성주보(漢城周報)』에 처음 등장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에는 남자 20세, 여자 16세가 되어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는 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랜 조혼 관습으로 이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에 당시 근대화를 추구하던 지식인들은 지각이 나기 전에 부모의 뜻대로 혼인하여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고, 골격이 자라기 전에 혼인하여 자식들이 튼튼하지 못하며, 남자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는 등의 논리를 제시하며 조혼을 타파해야 할 폐습이라며 대중을 계몽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남자 만17세, 여자 만15세 이상이 되어야 혼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칙이 내려졌지만 이후에도 이 조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혼이 폐습이라는 논의는 일제 강점기에도 지속되었고,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2. 과부재혼허용
1404년(태종 4)부터는 재가나 삼가한 과부를 실행한 여자와 마찬가지로 녹안(錄案)하게 되었다. 1436년(세종 18)부터는 재가 · 삼가녀의 자손은 사헌부 · 사간원 · 육조의 관원으로 등용하지 않는 금고법(禁錮法)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삼가가 문제시되었다.
드디어 1477년 7월 과부재가의 법적 규제에 관해 많은 논란을 거친 끝에 재가한 사족 부녀의 자손은 관리로서 등용하지 않는다는 금고법을 입법, 시행하게 되었다. 이는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조(京官職條)에 규정되었으며, 형전 금제조(禁制條)에는 녹안하는 규정을 두었다.
이 법은 재가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형사 처벌하는 직접적인 개가 금지는 아니었다. 즉, 금고법과 녹안에 의한 간접 금지였으나 직접 금지의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실제 당시까지만 해도 명문의 족보에는 재가나 삼가한 딸과 남편의 이름은 물론 그 자손도 등재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련의 입법 조치가 즉시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양반계급에서는 재가하지 않는 것이 확고한 법으로서, 또 윤리로서 지켜졌다. 법률상 재가의 자유가 선언된 것은 1894년(고종 31) 6월 28일의 이른바 갑오개혁법에 의해서였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이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재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과 윤리는 1950년대까지도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13. 연좌제 폐지
길고 가혹한 역사를 지닌 우리 나라의 연좌법은 성문법적으로는 갑오개혁 때인 1894년 6월 28일의 의안(議案)인 ‘연좌율(緣坐律)을 물시(勿施)ᄒᆞᄂᆞᆫ 건(件)’에서 연좌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이후 형벌은 개인처형주의(형사책임개별화원칙)로 되었다.
그러나 연좌제는 공형벌로는 없어졌으나 행정적인 차원에서는 직접·간접으로 연대책임을 지워왔으며, 오늘날에도 ‘연좌’라는 어감에는 넓은 의미의 미개사회적인 집단적 책임 내지 연대책임의 의식이 깔려 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본인이 행한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에 의하여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되어서, 사실상 연좌제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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