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없는 드라마_레스터 시티의 우승
2016년 5월 3일, 영국 킹파워 스타디움에서 스포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레스터 시티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날 레스터 시티는 잔여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왜 그들의 우승이 화제가 되었을까?
창단 132년 만에 처음 우승한 사실도 놀랍지만,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로 승격된 지 불과 2년 만에 우승을 거둔 것은 기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많은 이들이 레스터 시티의 우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일이라고 놀라워했으며, 우승 과정 자체가 판타지 혹은 동화라고까지 감탄하기에 충분했다. 레스터 시티 구단이 스스로 세운 시즌 목표가 1부 리그 잔류였을 만큼, 리그 우승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상황이라 놀라움이 더했다.
프리미어리그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다. 하지만 테스터 시티는 2부 리그에서 1부로 승격된 지 불과 2년 밖에 안 된 애송이 팀이었다. 그야말로 레벨이 다른 쟁쟁한 구단들 사이에서, 레스터 시티는 2부 리그 강등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2015. 2016 시즌 초반에 돌풍을 일으킬 때만 해도 사람들은 레스터 시티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레스터 시티의 우승 확률이 5,000분의 1이라며?”
“우승 확률이 없는 팀치고는 초반에 선전하는군.”
“스타플레이어 한 명 없는 팀이니 점차 하위권으로 처지겠지.”
"돈도 없는 가난한 구단이잖아."
“다음 시즌에는 하부리그로 떨어질 약팀이야”
이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레스터 시티는 시즌 내내 승승장구했다. 창단 이후 132년 동안하부 리그를 전전하던 테스터 시티가 우승을, 확정 지을 때, 홈 팬들은 물론 전 세계인이 감동했다. 운영 자금이 넉넉잖아 가난한 팀, 특출 난 선수가 한 명도 없어 최약체라고 무시당하던 팀이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각본도 없는 완벽한 역전 드라마였던 것이다.
Dreams come true.
잉글랜드 축구 리그 시스템은 ‘풋볼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마치 생태계의 먹이 피라미드처럼 가장 높은 곳에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가 있고, 그 밑으로 챔피언십 리그 등 수많은 하부 리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1부 리그에 해당하는 프리미어 리그, 2부 리그 격인 챔피언십 리그, 그 밑으로 3부. 4부 리그 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무려 24개 리그 등급이 존재한다. 그중 최상위의 ‘프리미어리그'에는 단 20개 구단만 허락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첼시, 리버풀, 토트넘...... 이름만 들어도 가슴 뛰는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 축구 구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과 같은 리그에 속해서 일 년 동안 대적하는 것만으로도, 해당 구단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린다.
프리미어 리그는 인접한 다른 레벨의 리그 사이에서 승강제가 이루어지는 계층적 시스템을 가진다. 그래서 아무리 프리미어 리그에 속한 구단이라도 하위권으로 처지면, 다음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바로 밑 레벨 2에 해당하는 챔피언십 리그로 강등된다. 반대로 챔피언십 리그에서 상위권을 기록하면, 다음 시즌 레벨 1인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된다. 레벨이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열려 있는 시스템이다.
레벨 1에서 레벨 4까지는 프로 리그, 레벨 5부터 레벨 24까지는 아마추어 리그이며, 선수들은 더 높은 리그로올라 가기 위해 한 해 동안 죽을 힘을 다해서 그라운드를 누빈다. 물론 높은 리그로 승격하는건 말처럼 쉽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한 해 성적을 바탕으로, 해마다 승격과 강등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레벨 리그든 강등되는 팀과 승격되는 팀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들은 상위 리그 진출을 꿈꾸며 축구 선수의 이상을 키워 가고 있다. 레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개방형 체제가 잉글랜드 축구 리그를 세계적으로 성장시켰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꿈의 리그_프리미어 리그
잉글랜드 축구 리그가 다양한 레벨에 따라 철저한 위계 시스템을 구축한 것처럼, 인류 역사도 이에 못지 않게 신분제도에 따른 철저한 계급화로 점철됐다. 인도의 카스트는 가장 굳건한 신분제도였다. 태어날 때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신분이 한번 정해지면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운명이 되었다. 신라 시대 골품제 역시 왕족과 귀족은 성골과 진골이었으며, 6두품 이하 사람들은 능력이 출중해도 관직 진출을 제한받았다. 나아가 혼인, 가옥의 크기, 옷의 종류와 색깔, 장신구, 심지어 그릇의 재질까지 사회생활전반이 규제 대상이었다.
근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중세 이전의 극단적인 신분제도는 자취를 감추고 계급의식도 서서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요사이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도가 태동하여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다. 이른바 ‘수저 계급론'은 개인의 노력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에 따라 인간의 계급이 나뉘는 사회 현상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로, ‘금수저'는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흙수저'는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경제적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수지 계급론은 사회 양극화를 단적으로 드러내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미 기득권을 가진 상태에서 출발하면, 기득권을 갖지 못한 이들을 쉽게 이길 수 있다.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뒤처진 사람은 출발 자체가 불리하기 때문에, 경주에서 이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승자가 늘 승리를 독식하고, 부자가 더 큰 부를 가지는 불공평한 상황을 잉태하는 것이다. 이른바 ‘갑질'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폐단도 이런 신분제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다.
수지 계급론에 비견할 만한 개념으로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라 는 말이 있다. 1979년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이 조직 내 여성 승진의 어려움을 다루며 처음 사용한 이 단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을 의미한다. 능력과 자격을 갖춘 여성이라도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굳어 있어, 고위직 승진이 차단된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최근 유리 천장은 성별 뿐만 아니라 출신, 학력, 외모, 국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높은 자리에 올리가지 못하는 폐쇄적인 상황까지 확장되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처럼 상향 이동이 막힌 패쇄적인 사회에서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학습된 무력감(leamed helplessness)'을 유발한다. 이 개념은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의 실험에서 유래했다. 일정한 공간에 가둔 실험 쥐에게 반복적으로 전기 충격을 가하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수 없게 하면, 쥐는 처음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 아무리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견디며 주저앉아버린다. 이후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도, 실험 쥐는 전기 충격을 피하려 하지 않고 도망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이 실험에 비추어, 만약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가 하위 리그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를 치렀다면 어땠을까? 물론 안정적으로 상위 리그를 운영할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하위 리그에서 뛰는 선수 입장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심지어 해당 리그에서 연속 우승을 하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죽기 살기로 경기를 뛸 힘이 날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위 리그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학습된 무력감은 경기 질의 저하로 이어질 테고, 저급한 경기는 관중에게 외면 받을 것이며, 결국 잉글랜드의 축구 생태계는 자멸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잉글랜드 축구 리그가 방대한 팀을 보유하고 우수한 선수를 육성하며, 세계 최고수준의 프로 축구 리그를 운영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상위 리그와 하위 리그간에 활발한 이동을 보장한 데서 왔다. 더욱이 레스터 시티처럼 가난한 구단, 이름 없는 구단도 차별받지 않는 곳이 바로 프리미어리그다 .잉글랜드 이외에도에스파냐, 이탈리아, 독일 등 세계적인 프로 축구리그가 상하위 리그간 승강제를 실시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프로축구 'K리그'에도 2013년 승강제가 도입되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비록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언젠가 금수저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속담이다. 그러나 지금은종래의 속담이
“개천에서는 용이 나지 않는다.”
로 공공연하게 바뀌었을 만큼 안타까운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사회부터 뿌리 내리기 시작한 천박한 자본주의가 근본도 없는 신분제를 만들어 낸 탓이다. 신분 상승의 욕구가 쉽게 채워지지 않으면 로또나 투기에 기댄 한탕주의가 만연하고, 성형을 통해 운명을 바꿔 보려는 성형 열풍이 일기도 한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신분 상승하는 건전한 욕구를 독려 하려면,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끊임없이 날아오르는 사회가 ‘살아 있는' 사회다. 개천에서 날아오르는 용을 부러운 쳐다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재등용_FC 바르셀로나는 잘 키우고, 레알 마드리드는 잘 뽑는다 (1) | 2024.01.07 |
---|---|
정의_핸디캡 vs 공정 경쟁 (1) | 2024.01.07 |
시뮬라크르(Simulacre) vs 시뮬라시옹(simulation) (1) | 2024.01.07 |
시뮬라시옹_진짜와 가짜 (1) | 2024.01.07 |
스포츠_제비뽑기의 사회적 의미 (1) | 2024.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