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사상 : 경한운선 만의청 송개인 내동일 유평
경 : 경강상인
한 : 한강
운 : 운송업
선 : 선박제작
만 : 만상
의 : 의주
청 : 청나라와 무역
송 : 송상
개 : 개성
인 : 인삼
내 : 내상
동 : 동래
일 : 대일무역
유 : 유상
평 : 평양
1. 경강상인 한강 운송업 선박제작
경강상인이라 함은 조선 후기 경강(京江)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던 상인을 말한다. 경강은 오늘날 한강 유역으로 모든 조운선의 집결지였고, 서울과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소비지가 가까운 어물 생산과 유통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어서 일찍부터 상업 지대로 발전하였다. 경강상인은 한강에서 활동했던 상인으로, 지역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기 위해 배를 통해 상행위를 했던 경강선상(京江船商), 선상들이 머물 수 있는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의 중개까지 겸하던 여객 주인업, 조세 운송을 전담하던 경강선인(京江船人)을 모두 포괄하여 이르는 호칭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우세한 자본력과 상권을 갖춘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양의 경강상인, 개성의 송상(松商),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萊商)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경강상인들은 우선 자신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통 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상품의 출하 시기와 가격을 통제하면서 최대한 상업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다. 경강상인들이 취급했던 품목으로는 조세에 해당하는 미곡부터 목재, 소금, 어물 등 서울에서 필요한 생필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육로로 들어오는 양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경강 지역을 중심으로 유입량을 조절한다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선상업, 운수업 외에도 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납부하던 공인계(貢人契)에도 참여하여 상품 유통의 독점권을 강화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경강상인은 대상인으로서 자본을 축적해 갔고 조선 후기 상업에서 큰 위상을 차지했다.
경강의 연변에는 전국의 주요 산물이 조운을 통해 운반, 집적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15세기 초부터 많은 상인이 집결해 하나의 경제권역을 형성했고, 경강 상인의 활동무대였다. 그들의 주요 상행위는 정부의 세곡(稅穀)과 양반층의 소작료의 임운(賃運)이었다. 그러한 활동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지만,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7세기 이후부터였다. 그 무렵에 운행되던 경강선(京江船)의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보면 1702년(숙종 28)에는 200∼1,000여 석까지 실을 수 있는 배가 3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그들이 1년에 받는 배의 가격은 대략 1만여 석 정도였으며, 그것은 서울의 곡물 공급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곡물 운반에 있어서 경강 상인이 차지하고 있던 비중과 그들이 가진 자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강 상인의 치부 수단에는 정당한 선임(船賃 : 배의 운임)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곡물 운반 과정에서 자행되는 여러 가지 부정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운반곡에 일정량의 물을 타서 곡물을 불려 그만한 양을 횡령하는 이른바 ‘화수(和水)’라는 것이 있었다. 또한, 운반곡의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투식(偸食)’이라든가,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고패(故敗)’ 등도 그들에 의해 자주 행해지던 부정 행위였다. 그와 같은 각종 부정 행위는 결국 정부의 조세 수입(租稅收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세곡 운반 방법의 개선책을 여러모로 강구하게 되었고, 조운 제도의 재검토가 논의되어, 일부 제도는 실시되기도 하였다. 1789년(정조 13)의 주교사(舟橋司) 설치는 그러한 시책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세곡 운반의 이권을 계속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정부에서 세곡 운반권을 일방적으로 박탈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상인으로서의 위치와 중앙 정부와의 관계가 확고했다는 점, 둘째 그들이 세곡 운반을 폐업할 경우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운반할 길이 끊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조정에서 직접 조운 제도를 실시할 경우, 조운선(漕運船)을 확보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아무튼 그들에 의한 곡물 운수업은 17, 18세기 무렵에 이르러 삼남 지방의 세곡 및 양반 계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했고, 그들은 실질적으로 대규모 운수업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자본 축적 수단으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각종 상업 활동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상업 활동 범위는 거의 전국적이었다. 그들은 직접 선박을 이용해 지방의 생산지에 가서 상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경강 연변으로 운반해, 시전 상인에게 매도하거나 직접 수요자에게 판매하는 등의 매매 활동을 하였다.
취급 상품으로는 곡물과 어염(魚鹽)·목재류·얼음 등이 주상품이었으며, 특히 미곡은 그들의 주요 취급 물종이었다. 미곡으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은 각 지방에서 운반해온 미곡을 경강에서 매점해 서울의 미가(米價)를 조종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즉, 서울 양곡의 주공급원인 강상곡(江上穀)을 매점해 미가를 앙등시킨 뒤 매각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지방에 흉년이 들어 품귀 상태가 되면 미리 비축해 두었던 강상미(江上米) 혹은 공가미(貢價米) 등을 지방으로 운반, 판매해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한 매매 형태는 많은 미곡을 장기간 매점할 수 있는 자금의 여유가 없거나 각 지방간의 미가의 차이를 광범, 신속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그들의 자금 규모라든가 상업망의 확대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미곡 매점은 마침내 수요자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 반발은 점점 커졌다. 1833년(순조 33) 서울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쌀소동’은 반발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때의 ‘쌀소동’으로 서울 시내의 곡물전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각 영의 교졸들을 보냈으나 진압하기 어려워 좌우포청(左右捕廳)의 교졸들까지 동원해 주동자 여부를 가릴 것 없이 당일 안으로 효수(梟首)시킨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의 작폐는 대단히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후에 이 ‘쌀소동’의 직접적 계기가 미곡의 매점에 있었고, 그것은 미전인(米廛人)과 강상(江商)의 결탁에 의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러한 현상은 당시 상업계의 일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도고 상업(都賈商業)이 심화되어가던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도고 행위를 가능하게 하고 뒷받침해 줄 수 있을 만큼 상업 자본이 커졌음도 알 수 있다. 아울러 도고 상업에 반발하는 반도고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경강 상인은 활동의 근거가 선박을 이용한 운수업에 있었으므로 선박의 확보와 제조는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들이 선박을 보유하는 방법에는 구입하는 경우와 직접 건조하는 경우가 있었다. 구입하는 경우는 주로 사용 기한이 경과한 퇴병선(退兵船)을 사들여 그것을 개조해 사용하거나 혹은 지방에서 건조한 선박을 직접 사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직접 건조하는 경우는 목재 상인들로부터, 혹은 직접 선재(船材)를 구입해 선박을 건조하였다.
경강 연안의 주요 교통 수단인 진선(津船)의 개수(改修)와 신조(新造)를 경강의 선재 도고인(船材都賈人)들이 담당하였고, 조정에서 필요한 선박까지도 경강인들이 건조해 조달했던 점을 본다면, 그들에 의한 조선 사업은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경강인들이 그들의 발달된 조선술과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단순한 독점·매점 상업에서 나아가 자본을 재투자해나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만상 의주 청나라 무역
만상이라 함은 조선 후기 의주(義州)에 거점을 두고 중국과의 접경 지역(청나라)에서 상업 활동을 하던 상인을 말한다. 의주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을 출입하는 관문이었다. 의주는 이러한 지형적 조건 때문에 중국과 외교적 교류가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고 사행(使行)의 왕복을 빌미로 양국 간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만상은 의주를 중심으로 공식적인 무역이었던 개시(開市)와 사신이 왕래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던 비공식 사무역을 통해 활약한 상인을 말한다. 옛날에는 의주를 용만(龍灣)이라 불렀기 때문에 의주상인을 만상이라고 불렀다. 조선 시대 내내 의주에서는 상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외교 사절이 왕복하는 가운데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방물(方物)과 세폐(歲幣)를 운송하던 말[馬]이 의주에서 책문(柵門)에 이르는 과정에서 손실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여유 있게 빈 말을 포함시켰는데, 남는 말에 물건을 구입하여 싣고 의주로 되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필요한 중국 물자를 들여올 수 있었다. 또한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의주와 청의 심양(瀋陽)을 왕복하는 단련사(團練使)와 책문까지 가는 호송군(護送軍), 그리고 청에서 돌아와 의주로 향하는 화물을 맞이하는 연복자(延卜者)도 의주에서 출발하고 도착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행원들은 물자를 비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활동의 종착지가 의주였던 만큼 의주는 상인들이 모여들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만상이 취급한 상품은 중국과 직접 교역을 했던 홍삼과 중국으로부터 구입하여 동래의 왜관(倭館)에 판매했던 생사(生絲) 그리고 금, 은, 소가죽 등 다양하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우세한 자본력과 상권을 갖춘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松商),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萊商)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만상의 중국과의 교역 활동은 일본과의 중계무역으로도 이어졌는데, 만상과 동래를 거점으로 한 내상이 연결되어 국제 교류를 활성화시켰다.
3. 송상 개성 인삼
송상이라 함은 개성(開城)을 거점으로 국제 교역과 국내 상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상인 집단을 말한다. 개성은 고려 시대부터 중국, 동남아와 교역을 행하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부터 개경(開京)은 국제 무역 도시로 번성하였고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를 통해 사신들 간의 공무역(公貿易)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사신들과 함께 온 상인들은 사무역(私貿易)을 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개성의 옛 이름이 송악(松岳)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상인을 송상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우세한 자본력과 상권을 갖춘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萊商)을 꼽을 수 있다. 개성에는 한양과 같이 개성부(開城府)에 세금을 내고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시전 상인이 존재했다. 그러나 개성은 국제적인 교역이 활성화되었던 도시였기 때문에 사상(私商)들이 조직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송상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송방(松房)이라는 조직을 설치하여 전국적인 상품 유통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중국으로 인삼을 수출하여 부를 축적했는데 한 해에 수출되는 인삼이 수천 근에 달했다고 한다. 개성상인들은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광산업에도 진출하였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축적된 부를 관리하기 위해 송도사개치부법(松都四介治簿法)이라는 복식 부기법을 창안하여 회계 장부를 남겼는데, 이 자료를 통해 그만큼 개성상인의 활동과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내상 동래 대일무역
내상이라 함은 조선 시대 동래부(東萊府)에서 일본과 무역을 하던 상인을 말한다. 내상은 동래(東萊, 현재의 부산)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허가된 상인과 허가받지 못하고 잠매(潛賣) 행위를 하던 상인을 모두 포함하는 칭호이다. 조선은 국초부터 대마도(對馬島)와 동래의 왜관(倭館)을 창구로 일본과 교역을 진행하였다. 대마도는 식량 자급의 어려움 때문에 조선과의 무역이 반드시 필요했고, 조선에서도 왜로부터 들어오는 동남아시아 산 물품과 일본에서 생산되는 구리, 은 등의 금속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국 간 무역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었다.
동래상인은 일본과의 무역에 독점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양국의 무역은 동래 왜관에서 이루어졌는데 공식적인 무역은 개시(開市)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개시에는 동래부의 허가를 받은 자들에게 매달 여섯 차례의 교역만 허가할 정도로 제약이 심했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에서 1691년(숙종 17) 동래부에서는 30명의 상인만 왜관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허가된 상인들의 명단은 『동래부 상고안(東萊府商賈案)』에서 확인할 수 있다. 1678년(숙종 4)에 20명으로 제한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왜관 무역의 규모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 왜관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의 수를 늘이면서도 한편으로 제한을 가했던 중요한 이유는 정부 차원에서는 일본으로 유출되는 물자의 증가로 생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한정된 개시에서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상인들끼리 조합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본과의 무역은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변모해 갔는데 가장 큰 변화는 교역 물자에서 나타났다. 18세기 중반에는 조선의 소가죽과 소뿔을 일본의 구리와 교환하였고, 19세기에는 마른 해삼과 황령(黃岺)을 포함한 품목이 수출되고 역시 구리를 수입하였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에서 필요한 물자는 한정된 개시에서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따라서 허가된 상인 외에도 관의 금지 조치를 어기고 수입이 금지된 물품을 잠매하는 상인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과의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중국, 일본 간의 중개무역을 진행하는 등 점차 성장해 갔다.
5. 유상 평양
유상이라 함은 평양(平壤)을 거점으로 활동한 상인 집단을 말한다. 유상은 평양에서 활동한 상인을 말하는데 평양의 옛 이름이 유경(柳京)인 데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평양은 평안 감영의 소재지로서 지역 시장권의 중심지였다. 평안도는 조선 시대에는 사족(士族)이 없다고 언급될 정도로 신분 간의 갈등이 적었고, 상업에 대한 인식도 심하게 부정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평양은 중국과 인접한 지역으로 중국과 동래(東萊)를 연결하는 무역로의 중심이었다. 평양상인들은 이러한 환경적 배경을 기반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평양은 중국 사신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대접하기 위한 예산인 칙수(勅需)가 상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자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택리지(擇里志)』에서도 평양을 서울과 개성 다음으로 상업이 번성한 지역으로 보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지리적⋅정치적인 여건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우세한 자본력과 상권을 갖춘 사상 도고(私商都賈)가 성장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개성의 송상(松商),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灣商), 동래의 내상(萊商)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평양상인의 활동은 평양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평양상인 중에는 선상 활동을 활발히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뿐만 아니라 동래에까지 영향력이 미쳤고 일본과도 연결되어 국제적인 상업 활동과도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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