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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역법 두문자 : 고당선 충원수 공명대 세칠 효청시

by 안녹산2023 202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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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정산

 

역법 : 고당선 충원수 공명대 세칠 효청시

 

고 :

당 : 나라 

선 : 명력

충 : 선왕

원 : 나라

수 : 시력

공 : 민왕

명 : 나라

대 : 통력

세 :

칠 : 정산

효 :

청 : 나라

시 : 헌력

 

 

1. 나라 명력

선명력은 중국 당나라 때 서앙(徐昻)이 만든 역법이다. 823년부터 당나라에서 채택되어 71년간 계속되었는데 당나라의 여러 역법 중 가장 오래 쓰였다. 일월식(日月蝕)의 계산법에 현저한 진보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일월식 때 태양시차(太陽視差)의 계산법을 개량하여 시차(時差)․기차(氣差)․각차(刻差)의 3차를 구함으로써 시차(視差)의 영향을 거의 완전히 계산해 냈다. 선명력이 한국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고려 초에 선명력을 이어받았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에서도 선명력이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이는 당에서 선명력을 채택한 시기가 통일신라 후기이고,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빈번히 왕래한 점으로 보아, 930년경 신라에서도 선명력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에서는 고려 충렬왕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 선명력이 쓰였다. 또한, 고려 때 수시력(授時曆)이 들어온 후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도 일식․월식의 계산만은 선명력의 방법을 썼다고 한다.

 

2. 선왕 나라 시력

수시력이라 함은 1270년에 원(元)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만든 역법(曆法)을 말한다. 수시력은 원나라 천문학자 곽수경이 1270년에 만든 역법으로 중국이 사용한 역법 중 가장 우수한 역법으로 손꼽힌다. 원나라 때 아랍의 선진적인 천문학, 특히 천문 기구를 이용함으로써 정밀한 관측 데이터를 얻고 이를 활용하여 역법을 고안할 수 있었다. 수시력은 1년 길이를 365.2425일로 정하고 있으며, 태양의 궤도와 달의 궤도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역법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뛰어난 역법이었다. 명나라는 건국 초 대통력(大統曆)을 제정하였지만 이는 수시력의 이름을 바꿔 사용했을 뿐이므로, 수시력은 당시 지배적인 역법 체계였다.

 

고려 시대에는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하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이후인 충선왕 대에 수시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위상과 국왕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당시 지배적인 역법인 수시력을 더욱 완벽하게 이해해서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높았다. 이 과제를 완수한 인물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이었다.

 

1432년(세종 14) 세종은 본격적인 천문 역산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라는 역법의 정비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수시력을 바탕으로 하여 편찬된 『칠정산내외편』은 역법의 원리와 고도로 복잡한 계산법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천문학적 기반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수시력은 서양 선교사들이 근대 서양 역법을 소개하기 전까지 400년간 사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을 도입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3. 민왕 나라 통력

중국 명나라의 누각박사 원통(元統)이 만든 역법. 명나라에서 반포된 것은 1368년인데, 이 역법은 1384년에 역원을 홍무 17년으로 고쳐 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 받아들여 효종 때까지 사용하였다. 

 

대통력은 중국 명나라 역법으로 한국에서는 고려후기부터 1653년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사용한 역법이다. 대통력은 이름만 다를 뿐 원나라의 수시력과 거의 동일한 역법으로, 수시력의 천문상수(天文象數) 중 일부와 역원(曆元)을 1281년인 지원(至元) 18년에서 1384년인 홍무 17년으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시헌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조선은 역서명을 대통력으로 사용하였지만, 천문 계산에서 수시력과 대통력을 종합한 『칠정산(七政算)』을 사용하였다.

 

대통력의 경우도 첫 면에 달의 대소 및 24절기 입기 시각이 적혀 있는 등 일반적인 전통 역서 체제를 하고 있으나, 주목할 점은 권두서명이 없다는 것이다. 대통력은 권두서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방위(方位)와 관련한 소위 세덕합이라는 것이 위치해 있다. 세덕합은 천지음양을 배합하는 신(神)이라고 하는데, 이 방향으로는 집을 짓거나 수리하거나 결혼하거나 먼 여행을 해도 좋다는 미신이다. 예를 들어 길한 방위는 갑년(甲年)에는 기(己)에 있고 을년(乙年)에는 경(庚), 병년(丙年)에는 신(辛), 정년(丁年)에는 임(壬), 무년(戊年)에는 계(癸), 기년(己年)에는 다시 기(己)에 있다고 한다. 1594년 대통력을 보면, 큰 글씨로 태세재갑오(太歲在甲午) 세덕재갑합재기(歲德在甲合在己)라 적혀져 있는데 이는 1년 중 가장 길한 방향을 알려준 것이다.

 

대통력에는 권두서명이 없지만,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의 대통력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모든 대통력에 권두서명이 없는 것은 아니고 1600년을 기준으로 현재의 시헌서(時憲書) 체제로 변화한 듯하다. 현재 1600년 대통력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1598년 대통력까지는 권두서명이 없으나, 1604년 대통력에는 중국 연호가 들어간 권두서명이 첫 면 첫줄에 인쇄되어 있다. 이 시기에 갑자기 역서에 중국 연호가 들어간 배경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군 파병에 대한 조선의 고마움을 역서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이 시기 조선에서 역서가 발행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명나라가 불쾌함을 표현하자 이를 피해갈 목적으로 권두서명에 명의 연호를 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후 중국 연호가 들어간 권두서명은 1894년 역서까지 약 300년간 이어졌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원의 역법이었던 수시력이 대통력으로 개력되었다. 명나라 건국 초기에 태사원(太史院) 사(使)유기(劉基)가 무신대통력(戊申大統曆)을 태조(太祖)에게 올리고, 1370년(홍무 3) 대통민력(大統民曆)이 만들어졌지만 이는 모두 원나라 때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수시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384년(홍무 17) 누각박사(漏刻博士)원통이 수시력을 약간 수정하고, 그 해를 역(曆)의 기원으로 하여 대통력, 즉 『대통력법통궤(大統曆法通軌)』를 만들었다. 이것은 1년을 365.2425일로 하는 역법은 수시력과 동일했고, 100년마다 1만분의 1씩을 줄이는 소장법(消長法)을 수시력에서 뺀 것이 수시력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대통력은 명나라 말기까지 260여 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한국에는 고려후기 에 전해져서, 1654년(효종 5)부터 시헌력을 사용할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4. 정산

『칠정산』은 『칠청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아울러 이른다. 조선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천문학 연구와 역서 편찬에 많은 공을 기울였고, 이는 1444년(세종 26) 두 책의 간행으로 결실을 보았다. 『칠정산내·외편』은 『세종실록』권156∼163에 실려 있으며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이 각기 독립된 형태의 서적으로도 간행되었다.

 

우리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법을 받아 사용했다. 천하의 패권을 쥔 중국 황제는 스스로 역법을 만들지 못했던 주변 국가의 제후들에게 자국의 역법을 하사하였다. 중국은 송·원대에 이슬람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역법을 만들었고, 이를 고려로 전했다. 고려는 당 역법인 선명력(宣明曆)을 쓰다가 1281년(충렬왕 7)에 원에서 만든 수시력(授時曆)을 받아들였다. 다만 수시력의 수용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려 천문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선명력을 주로 사용했고, 수시력은 제한적으로 이용하였다. 일·월식 계산과 오성(五星, 금성·목성·수성·화성·토성) 운동의 관측은 계속 선명력을 썼다. 고려 말에는 명에서 수시력을 일부 수정한 대통력(大統曆)을 받아들였지만, 이 역시 전면 수용하지는 못하였다.

 

‘칠정(七政)’은 일곱 천체, 즉 태양, 달, 오행성을 가리키고, ‘산(算)’은 계산한다는 뜻이다. 즉, ‘칠정산’은 태양, 달, 오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전통시대 역법은 ‘관상수시(觀象授時)’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관상수시’는 하늘의 모양을 보고 백성에게 때를 내려준다는 뜻이며, 역법은 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이의 순환 주기를 계산해서 시간을 세는 것이다. 세종은 ‘칠정산’의 움직임을 통해 조선의 자연환경에 맞는 날짜와 절기를 알려줌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려 했다. 또한 일식‧월식과 같은 천문현상을 예측하며, 해와 달, 수성, 화성, 목성, 토성, 금성의 운행을 예측하며 천문현상에 대응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 역법을 수용하여 사용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처음으로 우리나라 독자적인 역법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하였다. 일반적으로 『칠정산』으로 통칭하여 부르기 때문에 두 책이 같은 내용을 나누어 담고 있다고 인식되는데, 엄밀하게는 서로 다르다.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칠정산내편』은 원의 수시력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러나 원 수시력은 중국의 북경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따라서 『칠정산내편』은 원 수시력을 쉽게 설명하면서 우리 수도 한양을 기준으로 하여 ‘칠정’의 운행을 설명하였다. 이를 위해 천체의 운동을 계산하고 천체 현상을 예측하는 모든 방법이 망라되어 있다. 즉, 태양과 달의 운동을 계산하여 연월일시를 정해 달력을 만드는 법, 태양의 운동을 계산하는 법, 달의 운동을 계산하는 법,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법, 오행성의 운동을 계산하는 법, 네 개의 가상 천체인 사여(四餘, 紫氣星·月孛星·羅喉星·計都星)의 운동을 계산하는 법 등이 서술되었다.

 

『칠정산외편』은 전통적인 중국식 역법이 아니라 서역(西域, 중국을 기준으로 서쪽 지역)의 천문학을 담았다. 『칠정산외편』의 핵심은 중국 원·명시기에 아라비아에서 전래된 회회력(回回曆)이다. 이 회회력을 해설하여 날짜, 24절기, 한양의 일출과 일몰 시각 등을 구하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즉,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의 이론에 기초한 서양 천문학이 이슬람권에서 더욱 발전되었고, 이것이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수용된 것이다. 따라서 칠정의 계산 방식이나 수치도 『칠정산내편』과 다르다. 일례로 『칠정산내편』의 1년이 365일 2425분이지만, 『칠정산외편』은 365일 5시 48분 45초로 지금 값보다 1초 짧다.

 

『칠정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 서적이다. 세종대 약 20여 년에 걸쳐 중국의 천문학과 산학(算學) 등을 연구하고 각종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제작과 천문 관측을 병행하면서 측정 결과와 일치하게 만들었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이 조선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되었다. 『칠정산』의 편찬은 세종의 도전이기도 했다. 전통시대 동양사회에서는 역법은 천자(天子)인 중국 황제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 권한이었고, 새로운 역법을 선포하는 것도 오롯이 황제만 가능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러한 관례를 깨고 조선의 독자적인 『칠정산』을 편찬하였다. 게다가 이는 중국 역법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역법까지 연구한 결과였다. 한 연구자는 세종대의 과학기술이 아라비아의 꺼져가는 전통을 중국 원의 과학 발달을 매체로 새롭게 발전시켰다고 평가하였다.

 

5. 나라 헌력

시헌력이라 함은 중국에 온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 주도로 만들어진 서양식 역법(曆法)을 말한다. 시헌력은 청나라에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한 예수회 신부 아담 샬 등이 소개한 서양식 역법이다. 대통력을 사용했던 청나라는 대통력보다 서양의 역법이 일식과 월식 등을 더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서양식 역법으로 개력(改曆)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1629년(인조 7)부터 서양식 역법을 도입하여 숭정역법(崇禎曆法)을 사용하였으며, 이를 교정한 시헌력을 1645년(인조 23)부터 청나라 말까지 사용하였다. 시헌력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이전에 24절기의 간격을 균등하게 나누어 실제 태양의 고도와 차이를 보였던 평기법(平氣法)과 달리 24절기의 간격을 조정하여 태양 고도와 일치하는 정기법(定氣法)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1644년(인조 22) 관상감 제조였던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시헌력을 도입할 것을 계획하였으며, 이때 시작한 개력 사업은 10년 만인 1654년(효종 5) 『시헌력서(時憲曆書)』 편찬으로 결실을 맺었다. 중국에서는 시헌력 개력과 발전 과정에서 많은 역학서들이 편찬되었으며, 서양과 직접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던 조선에서는 중국에 도입된 서양 천문⋅역법서를 토대로 하여 독자적으로 시헌력에 통달하였다. 시헌력 체계는 1895년(고종 32)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을 채택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시헌력에서 현재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력으로 변화한 것은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서구 중심 세계 질서로 재편되었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시헌력은 구력(舊曆) 또는 음력(陰曆)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며, 시헌력을 기초로 한 태양의 고도에 따른 24절기도 세시풍속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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